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할아버지는 안희서(安希諝), 아버지는 안석(安碩)이며 어머니는 안성기(安成器)의 딸이다.
죽계(竹溪 : 지금의 풍기)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사대부의 한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금주사록(金州司錄)·사헌규정(司憲糾正)·단양부주부(丹陽府注簿)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에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했다. 그곳에서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 성균악정(成均樂正)·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됐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됐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됐다. 그러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다시 파직됐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전법판서(典法判書)·감찰대부(監察大夫)에 등용됐고, 이어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1344년(충목왕 1)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다음 해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차례로 지냈다. 1347년(충목왕 3)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돼 양전(量田: 세입을 위해 토지를 측량하는 일)에 참여했다.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어 명성이 높았다. 강원도존무사로 있을 때에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내용을 담아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있을 때에는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수정·보완했다. 충렬(忠烈)·충선(忠善)·충숙(忠肅) 세 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저서로는 『근재집(謹齋集)』이 전한다.
1347년에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祭享)됐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