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때의 사람인 듯하다. 자는 명유(明裕). ‘우조이삭대엽’조의 시조 8수와 ‘계면조(界面調)이삭대엽’조의 시조 6수가 『청구영언』(대학본)에, 다른 시조 1수가 『가곡원류』(증보본)에 각각 전한다.
‘자황분경(雌黃奔競)ᄒᆞᄆᆡ ᄯᅥᆯ치고 고원(故園)의 오니’ ‘진세(塵世)ᄅᆞᆯ ᄯᅥᆯ치고 죽장(竹杖)을 훗ᄯᅥ집고’ ‘찰하로 강산(江山)에 물너와셔 이종요년(以終夭年) ᄒᆞ리라’ ‘세사(世事)를 후리치고 산당(山堂)으로 도라오니’ 등의 작품 내용으로 보아 산수간에 은거하였을 것이다.
‘탁주반호(濁酒半壺)의 청금횡상(淸琴橫床) ᄲᅮᆫ이로다’, ‘슐을 ᄂᆡ아 더야 광약(狂藥)인쥴 알것마는 잔(盞) ○아 우음나니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라 유령(劉伶)이 이러험으로 장취불성(長醉不醒)ᄒᆞ니라’, ‘뵈ᄌᆞᆷ방이 호뮈메고 논밧가라 기음ᄆᆡ고 농가(農歌)을 부로며 달을 ᄯᅴ여 도라오니 지어미 슐을 거르며 내일(來日) 뒷밧ᄆᆡ옵세 ᄒᆞ더라’, ‘소쇄(瀟洒)ᄒᆞᆫ 수변정자(水邊亭子)의 대월음풍(待月吟風) ᄒᆞ리라’ 등의 작품 내용으로 보아 술을 좋아하고 농경하며 자적(自適)하던 은사(隱士)였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