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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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전 홍유후 설총 묘 정면
경주 전 홍유후 설총 묘 정면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때, 통일신라의 3대 문장가로 이두문자를 집대성한 학자.
이칭
총지(聰智)
시호
홍유(弘儒)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655년
사망 연도
미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설총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3대 문장가로 이두 문자를 집대성한 학자이다. 655년(무열왕 2)에 태어났으며 사망일은 미상이다. 아버지는 원효대사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다. 경사에 해박하여 우리말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향찰(이두)을 집대성, 정리하여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또는 한학의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설총이 신문왕에게 치자의 도리를 장미꽃과 할미꽃의 우화를 통해 간한 「화왕계」가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목차
정의
남북국시대 때, 통일신라의 3대 문장가로 이두문자를 집대성한 학자.
개설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 · 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삼국사기』에 “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근거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讀創製說)이 비롯되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吏讀 · 吏道 · 吏吐 · 吏套 · 吏頭 · 吏札’ 따위로 불리는 이 방법은 향가 표기법인 향찰(鄕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말로 육경을 읽는 데 능통했다고 해서 이것을 이두 또는 향찰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향가 표기식 방법, 즉 향찰은 설총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568년( 진흥왕 29)에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에도 이미 나타나 있고, 또 설총 이전에 향찰로 표기된 향가 작품으로는 진평왕 때의 「서동요(薯童謠)」 · 「혜성가(彗星歌)」선덕여왕 때의 「풍요(風謠)」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설총이 향찰(이두)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향찰을 집대성,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설총은 향찰의 권위자로 봄이 타당하다.

설총은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또는 한학의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관직에 나아가 문필에 관계되는 직, 즉 한림과 같은 직에 있었을 것이며, 신문왕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 『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 「화왕계(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 「화왕계」는 「풍왕서(諷王書)」라는 이름으로 『동문선』 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동사강목(東史綱目)』
『동문선(東文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동사열전(東師列傳)』
「설총」(이숭녕, 『한국의 인간상』 4, 신구문화사, 1980)
「이두(吏讀)에 관한 신고찰」(김근수, 『국어문학』 4-1, 전북대학교, 1955)
「이두학사연구서설(吏讀學史硏究序說)」(강윤호, 『국어국문학』 15∼20, 1956∼1959)
「이두기원의 재고찰」(정인승, 『일석송수기념론총,』 1957)
「신라육두품연구」(이기백, 『성곡논총』2, 1971)
「설총과 그의 화왕계」(박노춘, 『문호』 6·7합병호, 건국대학교, 1972)
「신라골품제하의 유교적정치이념」(이기백, 『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1986)
「설총과 화왕성」(손정인, 『경산문학』 2, 1992)
「설총의 유학사적 위치」(천인석, 『국학논총』 2,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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