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두품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다음의 높은 계급으로, 차지하기가 힘들다는 뜻에서 일명 ‘득난(得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사회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하면서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것은 골제와 두품제로 편제되어 있는데, 6두품은 두품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계급이다. 골품제에 편입되는 자는 왕경인(王京人)에 한했고, 중앙관직에 임명되므로 지배집단에 속했다. 6두품은 최고의 신분층은 아니었지만 중앙귀족이었다.
신라귀족은 골품에 따라 관직에 오를 수 있는 등위가 결정되어 있고, 타는 수레나 사용하는 기물·복색·거주하는 집의 크기에 제한을 받았다.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오를 수 있었고, 아찬에서 더 관등을 올려야 할 경우 중위제(重位制)를 적용해 중아찬(重阿飡)에서 4중아찬(四重阿飡)까지를 제수하며,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으로 올리지 않았다. 834년(흥덕왕 9)에 반포된 규정은 비록 진골과 6두품 신분을 구별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지만, 5두품이나 4두품에 비해 6두품에 대한 제한규정이 훨씬 적은 편이다.
6두품에 속한 중요한 가문으로는 우선 설씨(薛氏)를 들 수 있다. 설씨는 원효(元曉)가 속한 가문으로, 본래는 압독국(押督國)의 왕족이었다. 가야가 멸망한 뒤 왕족은 진골로 편입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왕족이나 최고귀족은 6두품으로 편입되었다. 강수(强首)가 곧 이러한 사례에 해당된다.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 역시 멸망 후 일부가 골품제로 편입되었고, 신분이 높은 귀족은 6두품으로 편제되었다.
그 밖에 이순(李純)·이순행(李順行)·이정언(李正言) 등의 이씨 가문, 신라 하대 최치원(崔致遠)으로 대표되는 최씨 가문이 6두품에 속하였다. 곧, 6부(部)의 6성(姓)이 6두품의 대표적 가문이다.
사로부족(斯盧部族)을 이루고 있던 부족장 가족이 왕족인 진골 바로 밑의 신분층으로 형성될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졌다. 이들이 일단 6두품 신분으로 성립되고 난 뒤, 사로국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병합된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지배자나 귀족국가의 상류귀족이 6두품으로 편입되어갔다.
6두품 가문 중에 김씨(金氏)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김지성(金志誠)이 곧 6두품이다. 그가 본래 왕족인 김씨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라 하대가 되면 진골에서 강등해 6두품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한 낭혜선사(郎慧禪師)가 강등된 6두품이다.
그의 아버지 범청(範淸)은 진골이었는데, 낭혜선사대에 이르러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
낭혜선사의 6두품으로의 강등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는 편이다.
신라사회에서 친족집단의 범위는 7세대까지라 하여, 진골신분으로 최초의 왕인 무열왕의 8대손이기 때문에 낭혜선사는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학설에 의하면 낭혜선사는 8세대 동안 무열왕계의 방계로만 내려왔다는 결론이 되며, 그럴 경우 그는 6두품으로 강등되는 것이 당연하게 된다. 그러나 낭혜선사가 8세대 동안 무열왕계의 방계로만 내려왔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다음으로 범청이 김헌창(金憲昌)의 난(822)에 가담했기 때문에 난이 평정된 뒤, 아들인 낭혜선사가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는 설이 있다. 신라 하대에 왕위계승을 위한 진골귀족 내부의 권력쟁탈전이 계속되었고, 싸움에서 패했을 때 그들은 중앙에 있지 못하고 낙향해 호족이 되어갔다. 이럴 경우 신분이 강등될 가능성은 인정될 수 있다. 신라 하대가 되면서 수적으로 증가일로에 있는 진골귀족은 그 일부가 6두품으로 강등되어 나갔던 것이다.
6두품 세력은 처음 유학 등의 학문이나 종교적인 면에서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 원광(圓光)과 원효가 6두품 신분이었다. 물론, 진골신분의 고승도 있었다.
학문적인 면에서 6두품 세력의 진출은 주목될 수 있다. 이들은 신분적인 한계성을 학문을 통해 극복하려 했고, 자연히 6두품 신분의 학자들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내세우면서 골품체제에 반발하였다.
신라 중대(中代) 이래 6두품 세력의 대표적 인물, 예를 들어 설총(薛聰)을 비롯해 김지성·이순·여삼(餘三)·녹진(祿眞) 등이 모두 국왕의 총애를 받아왔다.
6두품 세력이 반발했던 대상은 왕권이 아니라 진골세력이었다. 이들은 진골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골품체제에 반발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왕권과의 결합을 도모하였다.
왕권을 강화하는 데 집사부(執事部)는 중요한 기능을 했는데, 이들은 주로 집사부의 시랑직(侍郎職)으로 임명되었고, 이것이 왕권과의 결합을 순조롭게 하였다.
신라 하대(下代)에 이르자 중대의 전제주의가 무너지고 진골 중심의 골품체제에 여러 가지 모순이 나타났다. 그러자 6두품 세력은 이를 비판하면서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다. 진성여왕 당시 최치원이 올린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조처는 왕권에 유리한 것이었고, 자연 진골귀족들에 의해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6두품 세력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었다.
결국 최치원은 은둔하게 되고, 같은 6두품 출신인 최승우(崔承祐)나 최언위(崔彦撝)는 후백제나 고려로 나아가 그들의 경륜을 펴고자 하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게 된 것이 새로운 왕조인 고려가 들어선 이후였다. 6두품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뒤 고려왕조에서 새로운 관료로 등용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제의 제약에서 벗어난 중앙귀족이 되어, 그들의 학문에 바탕을 둔 정치이념을 실천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의 개혁정치는 신라를 부인하지 않고 그 안에 안주하려는 한계성을 가졌다. 이 점이 신라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가려는 지방호족의 주장과는 차이를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