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61년~875년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국선의 자리에 있었는데, 헌안왕이 그 사람됨을 보고 사위로 삼고자 두 딸 중 한 사람을 택하게 하자 큰 딸을 택해 결혼하여 왕위에 올랐다.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낭도 중에는 승려가 많았으며, 국학에도 관심을 쏟아 국학에 행차해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는 등 통치질서를 확립하려고 의욕적으로 노력했다. 국선 출신의 지도적 인물들도 왕의 통치에 적극 협력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을 바로잡지는 못했고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재위 861∼875. 성은 김씨, 이름은 응렴(膺廉) 혹은 의렴(疑廉). 아버지는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이며, 할머니는 충공(忠恭)의 딸인 문목부인(文穆夫人) 김씨이다. 왕비는 헌안왕의 큰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또, 뒤에 헌안왕의 작은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 : 정강왕) · 정(晸 : 헌강왕) · 윤(胤)이고, 딸은 만(曼 : 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 위홍(魏弘)이 있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國仙)이 되었다. 일찍이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그는 선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다.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해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그가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해,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範敎師 : 『삼국사기』에는 흥륜사(興輪寺)의 승려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딸과 결혼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관심이 많아 낭도 중에는 승려가 많았다. 864년 감은사에 행차했고, 866년 황룡사에 행차해 연등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경문왕은 불교와 아울러 국학에 대한 관심도 표명하였다. 864년 국학에 행차해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문왕의 관심은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 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 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邀元郎) · 예흔랑(譽昕郎)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은근히 왕을 위해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지었다. 그 뒤 사지(舍知)인 심필(心弼)을 시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현금포곡(玄琴抱曲)」 · 「대도곡(大道曲)」 · 「문군곡(問群曲)」 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다.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으나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해 칭찬하였다.
즉위 초인 861년 대사면을 실시하고, 862년 이찬(伊飡) 김정(金正)을 상대등으로, 아찬(阿飡) 위진(魏珍)을 시중에 임명하였다.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懿恭大王),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봉하였다. 그리고 왕비를 문의왕비(文懿王妃)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치국에 임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중대 이후에는 반란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允興)과 그 동생 숙흥(叔興) · 계흥(季興)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金銳) · 김현(金鉉) 등의 모반, 874년 근종(近宗)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그러나 경문왕은 국학 행행(幸行), 근시직 등용과 토목공사 등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하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잠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의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