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75~886년이며 아버지 경문왕을 이어 즉위했다. 부왕 때부터 시작된 국학 진흥활동에 박차를 가해 국학에 적극적이던 6두품 신분층의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졌고 이들이 국왕의 지지세력으로 활약했다.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도 도모하여 황룡사에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듣는 등 불교진흥에도 힘썼다. 백성들의 지붕은 기와로 이어졌고, 밥할 때 숯을 때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신라 최전성기의 왕으로, 당나라와 일본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정(晸)이다. 아버지는 경문왕(景文王)이고,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로 봉해진 헌안왕(憲安王)의 큰딸 영화부인 김씨(寧花夫人 金氏)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僖康王)의 아들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동생으로 황(晃: 뒤의 정강왕) · 만(曼: 뒤의 진성여왕) · 윤(胤)이 있다. 서자인 요(嶢)는 뒤에 효공왕(孝恭王)이 되었고, 딸은 신덕왕비(神德王妃)가 되어 의성왕후(義成王后)에 봉해졌다.
헌강왕대(憲康王代)는 표면적으로 금입택(金入宅)으로 표현되는 이른바 신라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신라 하대(下代) 진골귀족(眞骨貴族)의 모순이 첨예화되고 민심이 조정으로부터 서서이 이반되는 시기였다.
헌강왕은 즉위한 뒤 불교와 국학(國學)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다. 국학 진흥활동은 경문왕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헌강왕대에 이어진 것이다. 이를 통하여 국학에 적극적이었던 6두품 신분층의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또한 국왕의 지지세력으로 성장하였다.
876년(헌강왕 2)과 886년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강경(百高座講經)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寺刹幸)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望海寺)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해 박사(博士)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다. 883년에는 삼랑사(三郎寺)에 행차해 문신들로 하여금 시(詩)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879년 신홍(信弘)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곧 진압하였다. 그 뒤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880년 왕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경주의 사방을 바라면서, 백성들의 지붕은 볏짚이 아닌 기와로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때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과 같은 진골귀족에 국한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 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 · 군(州郡)을 순행했을 때였다. 어디에서 온 지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혹은 御舞山神)이라 한다.
또한, 헌강왕이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신(北岳神)과 지신(地神)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地理多都波)’라 했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해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한편, 동해안의 개운포(開雲浦)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處容)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처용가(處容歌)」가 만들어졌다. 이 처용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 이슬람 상인이나 지방 호족(豪族)의 자제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도 경문왕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화랑(花郞) 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외교 분야에서 헌강왕은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886년 봄에 적국(狄國)인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해 왕이 돌아가니 장지는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마련했다.
최치원(崔致遠)의 「사산비명(四山碑銘)」에 전해지는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헌강왕 12년(886년)에 찬술되기 시작하여 정강왕(定康王)대를 거쳐 진성여왕(眞聖女王) 10년(896년)경에 완성되었다.
숭복사라는 절의 개창 목적은 원성왕계(元聖王系)로서 왕위에 오른 왕들의 정통성을 표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비의 건립목적은 절에 관여한 역대 왕의 덕업(德業)을 중심으로 비의 건립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후세까지 전해 남기는 것이다.
대숭복사의 원래 이름은 곡사(鵠寺)이고, 경문왕이 즉위한 첫 해에 원성왕의 추선(追善)을 위해 그 원릉에 부속, 건립되었다. 경문왕을 계승한 헌강왕이 885년 교서를 내려 대숭복사라고 이름을 고친 것이다.
이 비문의 명문에는 왕토(王土)가 수차례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시기 왕토사상(王土思想)에 대해 관념적인 것으로서 실제적인 의미는 없다고 보기도 하고, 경문왕대 이후, 즉 9세기 말 6두품 지식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충분히 기능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