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때, 뛰어난 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전담하며 공을 세웠고, 당시 불교 중심의 신라 사회에서 미약했던 유학에 관심을 기울인 신라의 학자.
이칭
이칭
우두(牛頭)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충청북도 사량
주요 관직
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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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삼국시대 때, 뛰어난 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전담하며 공을 세웠고, 당시 불교 중심의 신라 사회에서 미약했던 유학에 관심을 기울인 신라의 학자.
개설

초명은 우두(牛頭). 중원소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의 사량(沙梁) 출신. 육두품(六頭品)으로 보이는 내마(奈麻)석체(昔諦)의 아들이다. 신라사회에서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 · 문장학을 가지고 진출한 지식층이며, 신흥 유교관료적 성격의 사람으로, 현존하는 기록상 최초의 본격적인 유교적 문인이다.

생애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꿈에서 머리에 뿔이 돋친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태어나자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현자(賢者)에게 가 물어보니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고 의리를 중히 여겼다. 아버지가 그에게 “불도를 배우겠는가, 유도를 배우겠는가?” 하고 묻자 강수는 “제가 듣기로는 불도는 세외교(世外敎)라고 합니다. 저는 속세의 사람이온데 어찌 불도를 배우겠습니까. 유자의 도를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뒤에 스승을 맞아 공부해 학문이 뛰어난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공부한 학과목은 『효경(孝經)』 · 『곡례(曲禮)』 · 『이아(爾雅)』 · 『문선(文選)』으로, 주로 유교적인 실천도덕과 아울러 문자와 문학에 관한 것에 비중을 두었다. 이로 인해 그는 유학자로서보다 문장가로서 더 유명하게 되었다.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며 사찬(沙飡)의 관등과 세조 200석을 증봉(增俸)받았다. 그가 죽자 왕은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었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러자 집안 사람들은 이를 모두 불사(佛事)에 보내주었다. 또한 그의 아내가 생활이 곤란해 향리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대신이 왕에게 청해 조 100석을 내리게 했으나 받지 않았다.

그는 청년시절에 자기보다 신분이 천한 부곡(釜谷)의 대장장이의 딸과 정을 통했다. 그가 20세가 되자 부모가 “너는 지금 명성이 높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자를 짝으로 삼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새로 읍 중의 인물로 아름답고 행실이 좋은 여자에게 장가들어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라며 거절하였다. 신분이 낮은 부인을 택한 것은 새로운 윤리관의 제시이며, 신라의 전통적인 윤리에 대한 비판적 태도였다. 나아가 골품제에 입각한 신라의 신분제에 대한 비판적 성격이 다분하다.

활동사항

스승을 맞아 『효경(孝經)』『곡례(曲禮)』 · 『이아(爾雅)』 · 『문선(文選)』으로, 주로 유교적인 실천도덕과 아울러 문자와 문학벼슬을 공부하여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 되었고, 벼슬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지냈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뒤 당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국서(國書)에 알기 어려운 대목이 있어 그에게 묻자 해석과 설명에 막히는 곳이 없었다. 왕이 감탄해 이름을 묻자 “신은 본래 임나가라(任那加良 : 大加耶, 지금의 경상북도 高靈 일대)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왕은 두골(頭骨)을 보니 가히 ‘강수 선생’이라 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또 당나라에 보내는 답서를 훌륭하게 지어 임금은 더욱 기특히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하였다. 그 뒤 당나라와 고구려 · 백제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게 되어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글을 짓기도 했다. 그 글들 가운데 당시 당나라에 갇혀 있던 김인문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한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는 당나라 고종을 감동시켜 곧 김인문을 풀어 위로해 돌려보내 주었다. 671년(문무왕 11)당나라의 장수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내는 글도 지었다.

재물에 뜻을 두지 않아 가난하게 지내자 태종무열왕은 유사(有司)에 명해 해마다 신성(新城)의 창고에 있는 조 100석을 하사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문무왕이 논공행상을 할 때 그는 외교문서를 통해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며 사찬(沙飡)의 관등과 세조 200석을 증봉(增俸)받았다. 그가 당시 유행하던 불교를 세외교라 하며, 사회적으로 힘이 미약한 유학에 뜻을 둔 것은 개인적 착상이라기보다는 진골 중심의 골품제 사회에서 육두품 이하의 귀족으로 편입된 그의 가족사에 영향받은 것이다. 또 크게는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가야의 귀족들을 사민정책(徙民政策)에 의해 강제로 이주시킨 중원경의 문화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강수(强首)와 그의 사상(思想)」(이기백,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한국연구원, 1978)
「신라골품제하(新羅骨品體制下)의 유교적(儒敎的) 정치이념(政治理念)」(이기백,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한국연구원,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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