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군(郡)의 불교 교단을 지도, 감독하는 직무를 가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주통(州統) 9인과 함께 군통 18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설치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주통이 9인이라는 점으로 보아 9주가 완비된 신문왕 5∼6년경 이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진흥왕 때에 이미 중앙의 최고 승관직인 국통(國統)이 있었기 때문에, 주통과 함께 군통도 삼국통일 이전부터 실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군통은 18인이 복수로 존재하였다. 이들은 9주 완성에 부수된 117군에 배속되었다기보다는 지방관인 주도독(州都督) 밑에 주조(州助) 9인이 있었던 것과 같이, 각 주의 주통 1인당 2인의 군통이 배속되어 주통을 보좌해 관할군을 살피는 승관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특히, 진흥왕대 이후 영토확장에 따라 군주(軍主)에 의한 군정(軍政)에 수반해 승려도 주·군에의 불교홍통을 위해 지방민의 교화에 힘쓰게 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의 국통에 대해 지방에는 주통·군통이 임명되어 지방 교단의 관리와 감독을 맡았다.
신라의 군통은 수나라의 승관제도, 즉 주 이하 군·현까지 포함시켜 지방의 사원을 감독하는 승관으로서 군통이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듯하다.
이러한 군통은 879년(헌강왕 5) 당시의 사실로,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문(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文) 가운데에서 남천군통(南川郡統) 훈필(訓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신라 말기까지도 군통이라는 승관직이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