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법은 당나라의 구양순(歐陽詢)의 체를 습득하여 필력이 힘찼으며, 비록 김생(金生)을 따르지는 못하더라도 기특한 품격이었다고 평가를 받았다. 872년(경문왕 12) 8월 14일에 만들어진 곡성대안사적인선사탑비문(大安寺寂忍禪師塔碑文)의 글씨를 썼다.
이 때 관직명은 중사인(中舍人)이었다. 그리고 3개월 뒤인 11월 25일에 완성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를 썼다. 여기에는 그의 관직을 숭문대랑겸춘궁중사성신(崇文臺郎兼春宮中事省臣)으로 표기하고 있다. 아마 문한기구인 숭문대의 낭으로서 중사인의 직을 겸대(兼帶)한 듯하다.
이밖에도 박거물(朴居勿)이 찬한 삼랑사비문(三郎寺碑文)을 썼고, 또한 흥덕왕릉비의 비문도 쓴 듯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48 김생열전에 부기(附記)된 그의 전에는 관직이 시중겸시서학사(侍中兼侍書學士)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그가 시중을 맡았다는 기사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시중은 시랑(侍郎)의 착오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시대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는 우리 나라 필법으로서는 김생 다음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도 동방서가(東方書家)의 이름 가운데 요극일을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