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890년(진성여왕 4)중국당나라에 건너가 국학에서 3년간 공부하고, 893년당나라의 예부시랑양섭(楊涉) 아래에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뒤 관직에 있다가 귀국하였다. 신라 말기의 6두품(六頭品) 출신 중에서 새로운 지식계급으로 대두하는 가장 대표적인 가문인 경주 최씨 출신이다. 특히, 경주 최씨 중에서도 최치원(崔致遠)·최인연(崔仁渷, 彦撝, 愼之)과 더불어 ‘신라 말기의 3최(三崔)’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경주 최씨들이 대개 뒤에 고려의 왕건(王建)에게로 가 문한직(文翰職)을 맡았던 것과는 달리, 후백제의 견훤(甄萱) 아래에서 봉사하였다. 그리하여 견훤을 대신해 고려태조에게 보내는 격서를 짓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927년(견훤 36)의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로서, 지금도 『삼국사기』·『고려사』·『고려사절요』·『동문선』 등에 실려 있다.
한편, 『동문선』 권12에는 「경호(鏡湖)」를 비롯한 칠언율시 10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작품들은 당나라 말기의 재상 위소도(韋昭度)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이모(李某) 또는 진사 조송(曺松)·진책(陳策) 등에게 주는 형식으로 된 점에서 볼 때, 당나라에 있는 동안 그의 교제범위가 최치원 못지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아마도 절도사의 막부에서 종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문장에 능해 사륙집(四六集) 5권을 저술하여 『호본집(餬本集)』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