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승통(僧統)’ 또는 ‘사주(寺主)’라고도 하였다. 국통의 직은 551년(진흥왕 12)에 고구려에서 망명해온 혜량(惠亮)을 임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551년에 거칠부(居柒夫)의 군대가 고구려의 10개군을 탈취하였을 때 혜량이 거칠부에게 의탁하였는데, 거칠부가 혜량을 왕에게 천거하여 승통으로 임명하고,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지법(八關之法)을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의 국통제는 고구려를 통해 중국의 남북조시대, 특히 북조계통의 북위(北魏)의 승관제가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국통이 최초로 임명된 진흥왕 때는 영토확장에 따라서 군주(軍主)의 군정(軍政)이 추진되었는데, 승려도 이에 수반되어 주군(州郡)의 불교 홍통(弘通)에 참여하였다.
또한, 진흥왕은 지극한 호불(好佛)의 군주로서,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겨서 불교왕국의 건설을 꿈꾸었다. 이러한 때에 진흥왕은 불교교단의 최고직인 국통을 임명하여 불교의 홍포에 진력했던 것이다. 당시 국통은 교학과 행정을 총괄했을 뿐 아니라 교단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인 방도까지 강구하였다.
국통 밑에는 대도유나(大都維那)와 대서성(大書省) 등의 승관이 있어 국통을 보조하였으며, 각 주에 파견된 주통과 군통 등도 국통의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혜량이 국통에 임명된 이래 선덕왕 때에 자장(慈藏)이 비상직(非常職)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국통에 임명된 기사가 없다. 이는 아마 사료일실에 그 원인이 있을 듯하다.
신라 하대에 들어와서 헌덕왕 때와 정강왕 때에 다시 국통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817년(헌덕왕 9)에 이차돈(異次頓)의 무덤을 수리하고 세운 비문에 국통 혜륭(惠隆)의 이름이 보이고, 886년(정강왕 1)에 헌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정원화엄경(貞元華嚴經)』의 사경(寫經)을 주관한 승관으로 국통의 이름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신라 말기까지도 국통이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