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간행에는 당시 대제학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盧思愼) · 강희맹(姜希孟) · 양성지(梁誠之) 등을 포함한 찬집관(纂集官) 23인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동문선』에는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고려의 김부식(金富軾) · 이규보(李奎報) · 이인로(李仁老) · 이제현(李齊賢) · 이곡(李穀) · 이숭인(李崇仁) · 정몽주(鄭夢周) · 이색(李穡) 등과 조선의 정도전(鄭道傳) · 권근(權近) · 변계량(卞季良) · 하륜(河崙) ·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 · 서거정 · 김종직(金宗直) · 성현(成俔) · 김수온(金守溫) 등에 이르기까지 문인(文人과 29인의 승려와 약간의 무명씨(無名氏)를 포함해 500인에 이르는 인물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에는 하나의 작품만 가지고 등장한 작가가 220여 명에 이른다. 이는 당시 문헌(文獻)의 인멸로 그들 작품의 전부가 전해지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우리 문학의 저변(底邊)이 확대되었다는 인식 아래 한두 편의 작품도 포괄하여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동문선』은 이 책 이외에 또 신용개(申用漑)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과 송상기(宋相琦)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 등 3가지가 있는데, 서거정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 등에 의하여 편찬된 것을 『신찬동문선』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신찬 동문선』은 제목이 '동문선'으로만 쓰여 있어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과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밖에 『정편 동문선』과 『정편 동문선』을 합하여 간행한 『정속편 합본 동문선』이 있다.
『정편 동문선』은 조선시대 성종의 명으로 1478년(성종 9)에 133권 45책의 을해자(乙亥字)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1482년 갑인자(甲寅字)로 찍은 재인본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으로 추측되는 을해자본 번각본(飜刻本)이 전하고 있으며, 1615년(광해군 7)에 임진왜란으로 거의 인멸되었으므로 서적교인도감(書籍校印都監)에서 재인하였다고 한다. 1915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성종 9년의 정편(正編)만 7책으로 번인하였다.
1966년에 경희출판사(慶熙出版社)에서 이우성(李佑成) 가장본(家藏本)을 영인(影印)한 『동문선』이 있다. 그 형태와 자체(字體) 로 보아 『정속편 합본 동문선』의 필서체자 목판본을 영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서 필서체자 『정속편 합본 동문선』과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인쇄한 『정편 동문선』을 대본(臺本)으로 삼아 국역본(國譯本)을 내었다.
신라의 김인문(金仁問) · 설총(薛聰) · 최치원을 비롯한 편찬 당시의 인물까지 500여 명에 달하는 작가의 작품 4,302편을 수록하고 있다.
상권 첫머리에 서거정의 서문(序文)과 양성지의 「진동문선전(進東文選箋)」이 실려 있다. 서거정은 서문에서 우리나라 역대의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다른 특질(特質)을 가진 우리의 글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力說)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 한문학 전통에 의한 대표적 문예집으로서 한국 문학 발전에 큰 자취를 남겼으며, 작품 자체가 우리 역사의 귀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체재(體裁)는 양성지의 「진동문선전(進東文選箋)」에서 중국 양조(梁朝)의 소명(昭明)이 선정한 『문선(文選)』을 모방한다고 하였는데 유(類)에 따라 나누어 찬집(纂集)하였다. 사(辭) · 부(賦) · 고시(古詩)에서부터 조칙(詔勅) · 교서(敎書) · 제고(制誥) · 표전(表箋) · 계장(啓狀) · 격서(檄書) · 잠명(箴銘) · 송찬(頌贊) · 주의(奏議) · 문(文) · 서(書) · 기(記) · 서(序) · 전(傳) · 발(跋) · 소(疏) · 잡저(雜著) · 책제(策題) · 축제문(祝祭文) · 애사(哀辭) · 행장(行狀) · 비명(碑銘) · 묘지(墓誌) 등 다양한 문체(文體)를 망라(網羅)하여 많은 작품을 수록하였다.
문체의 종류도 55종에 걸쳐 있어 중국 『문선』의 39종보다도 많다. 그 가운데 시는 약 4분의 1 정도에 그칠 뿐이고 나머지는 문(文)이다. 문 가운데에도 조칙 · 교서 · 제고 · 비답(批答) · 주의 · 차자(箚子) · 첩 · 책제 등 정교(政敎) 관계 문장과 표전 · 축문(祝文) · 소 · 도량문 등 의례성(儀禮性)이 강한 문장에 해당되는 것이 1,130편가량 된다.
특히, ‘표전’ 하나만 460여 편으로 전체 작품 수의 10%를 넘어서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표전의 내용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주로 임금에게 축하나 감사를 올리는 경우나 사양(辭讓)할 경우, 진상(進上)할 때 올리는 의례성(儀禮性)이 강한 글이다. 이를 통하여 『동문선』이 지배층(支配層)의 봉건적(封建的) 상하관계를 원만하게(圓滿) 유지하고 통치층의 권위(權威)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典型的)인 관각적(館閣的) 문학관(文學觀)의 산물(産物)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동문선』은 유교 국가의 관찬서(官撰書)이면서 도량문 · 재사 · 청사(靑詞) 등 도교 및 불교와 관련한 의례문(儀禮文)을 195편이나 싣고 있는데, 이는 당시 지배층의 이념(理念)이 철저하게 유교적이지는 않았음을 보여 준다. 동시에 그 내용이 대부분 국가와 임금 · 귀족의 복을 빌어 주는 의례적이라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했듯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실린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들 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로 된 화려한 문장이어서, 전체적으로 형식미(形式美)를 작품 선정의 기준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작품의 선정에 있어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최충헌(崔忠獻) 부자를 미화(美化)하고 찬양한 시문이 많이 실려 있고, 승려의 비명이나 탑명(塔銘), 그리고 불교의 교리(敎理)를 설파(說破)한 원효(元曉)의 일련의 불서(佛書)의 서문이 승려의 시 82편과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혜심(慧諶) · 일연(一然) · 보우(普愚) 등 쟁쟁한 선승(禪僧)들의 선시(禪詩)는 거의 한 편도 실려 있지 않은데, 이는 작품 선정자의 미의식(美意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동문선』은 관료(官僚) 귀족의 미의식에 맞는 화려하고 호부(豪富) · 숭엄(崇嚴)한 미, 우아 · 온유(溫柔)의 미에 지배되어 있으며, 비장미(悲壯美)나 골계미(滑稽美)의 범주에 드는 것은 드물다. 거의 철저하게 상층 지배층 중심의 시문을 포괄적(包括的)으로 망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예 작품으로서 큰 의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작품 자체가 우리 역사의 귀중한 기록의 하나로서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 우리나라의 문학 자료를 나름대로 집대성하였으며 한국의 문학 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분리된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대부분이 지배층에 관련된 의례(儀禮)나 의식이 반영된 글들이어서 사회 일부 계층을 위한 것이며 당시 지배층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관각적 문학관의 산물이다.
신라 · 고려시대의 기록과 도교 · 불교 관련 자료도 기록되어 있어, 주자학(朱子學) 일색(一色)의 문장으로 구성된 조선 후기의 다른 선집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양한 면모를 보여 준다. 이를 통해 당시의 문학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인식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후세에 커다란 혜택을 주고 있다.
『동문선』이 9회에 걸쳐 여러 번 거듭 인쇄되고 번각(飜刻)된 사실은 당송 시문만이 아닌 우리 시인 문사(文士)들의 작품도 소홀히 여겨지지 않고 널리 애독(愛讀)되어 왔음을 증명해 준다.
역대 왕조 실록(歷代王朝實錄) 등 국가의 귀중한 문헌들과 함께 각지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