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년, 행적, 신분, 무덤의 방향 등을 기록한 묘문이다. 일반적으로는 돌 위에 새기지만 벽돌, 청자나 백자에 쓰여진 것이나 무덤의 벽면에 묵서(墨書)하거나 새긴 명문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묘지는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오석(烏石)이나 점판암에 음각으로 새긴 묘지가 많고, 조선시대에는 자기로 만든 도판도 사용되었다. 피장자(被葬者)의 가계라든가 신분 등 개인 신상에 대한 것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를 아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묘지는 원래 중국의 동한(東漢) 시기에 기원하여 위진시대 이후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풍습이 한국에 유입된 것이다.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서 출토된 한(漢) 연평원년(延平元年: A.D.106) 고무중(賈武仲)의 처 마강(馬姜)의 묘지는 기재 내용이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묘지에 매우 가까운 초기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강소성(江蘇省) 비현(丕縣)의 무우(繆宇) 묘에는 뒷방(後室) 입구 상단에 피장자의 성명, 사망, 장례일자, 관직, 송사(頌辭)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한국의 묘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명문이 새겨진 방형의 소석판(小石版)이나 도판(陶版) 등의 형태를 지칭한다. 그러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묘지라고 하면, 무덤의 벽면에 쓰여지거나 새겨진 명문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 가운데 모두루총(牟頭婁塚), 동수묘(冬壽墓)로 알려진 안악 3호분(安岳 三號墳), 그리고 대안 덕흥리 벽화 고분(大安 德興里 壁畵 古墳)에 묘지로서 묵서가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묘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공주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것이다. 523년에 죽은 무령왕의 능에서 나온 이 지석의 성격은 지신(地神)으로부터 묘터를 산다는 토지매매계약서로서 중국에서는 매지권(買地券)이라 하는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지석의 출토상태를 보면, 무덤의 널방[玄室]에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는 왕비의 지석이, 오른쪽(동쪽)에는 왕의 지석이 있었고, 그 위에 양나라 오수전(五銖錢, 五銖鐵錢)이 놓여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묘에서 묘지가 많이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잘 물갈이한 장방형의 오석(烏石)이나 점판암제의 판석을 사용하여 음각으로 글을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 이래 사용되어오던 오석이나 점판암과 더불어 자기로 만든 도판이 함께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묘지는 묘비 모양, 단지 모양, 원통형, 표주형(標柱形) 등 다양하다.
당시에 지석을 묻는 방식은 묘지의 입지에 의해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묘지가 평지에 있으면 광중(壙中) 남쪽 가까운 곳에 먼저 오지그릇 하나를 묻고, 그 위에 지석을 놓은 다음, 또 작은 오지그릇을 사면으로 둘러 묻어, 먼저 묻은 그릇이 덮이게 만들었다.
또, 묘지가 가파른 산기슭에 있으면 광구(壙口) 남쪽 몇 자 되는 곳에 땅을 4~5자 판 후, 위와 같은 방식으로 매장한다. 또한 벽돌을 지석으로 사용할 때는 에 넣어서 묻거나, 나무궤에 담고 석회로 사면을 발라서 묻기도 한다.
묘지는 그 내용이 피장자(被葬者)의 가계(家系)라든가 신분 등 개인 신상에 대한 것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를 아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장례의식 중 묘지를 안치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면모가 엿보이기 때문에 묘지의 작성과 그것의 매납은 단순히 피장자의 이름이나 약력을 알린다는 것 이상의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