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전은 진시황 때 주조된 반량전(半兩錢)의 형태를 본받아, 한(漢) 무제(武帝) 원수(元狩) 5년(서기전 118년)에 각지의 군(郡)과 국(國)에서 주조되었다. 이로 인해 무게가 일정하지 않고 불량인 동전이 많아짐에 따라, 원정(元鼎) 3년(서기전 114년)에는 관영 공방에서 적측오수전(赤仄五銖錢)을 주조하였으며, 후원(后元) 2년(서기전 87년)까지 상림삼관(上林三官)을 설치하여 오수전을 전문적으로 주조하였다.
이후 위진남북조 시기 양(梁) 무제(武帝)가 보통(普通) 4년(523년)에 쇠로 주조한 철제오수전을 발행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4년(621년)에 개원통보(開元通寶)가 발행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약 730여 년 동안 유통되었다.
형태는 원전(圓錢)으로 직경이 2.45~2.65㎝ 정도이고 가운데에 방형(方形)의 구멍이 나 있다. 이 구멍을 사이에 두고 우측에 ‘오(五)’ 자, 좌측에 ‘수(銖)’ 자가 배치되어 있는데, 글자의 위치가 서로 바뀐 것도 있다. 특히, 주조 시 동전의 표면에 생긴 기호에 따라서 천상횡문(穿上橫文), 천하횡문(穿下橫文), 천상반성(穿上半星), 천하반성(穿下半星), 사각결문(四角決文), 사출문(四出文)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후한 이후에는 동전의 둘레를 갈아서 작게 하거나 방형의 구멍을 크게 잘라 내는 등 형태를 변형시킨 마곽오수(磨郭五銖), 전륜오수(剪輪五銖), 정환전(鋌環錢) 등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사주전(私鑄錢)이 대대적으로 횡행하며 전국적으로 유통되자 실질적 가치가 점차 하락하면서 화폐로서의 가치가 상실되기도 하였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철제오수전은 양 무제 시기에 동전을 꿰어 유통시킨 당시의 사회적 양상을 보여 준다.
서기전 108년 무렵,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유입되기 시작한 오수전은 대동강 상류에서 청천강으로 이어지는 지정학적 요충지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는데,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서북부 지역에 밀집해 있다. 평양 정백동 3호분, 정오동 12호분, 석암리 120호 등지의 낙랑무덤뿐만 아니라,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봉산군 지탑리, 황주군 선봉리, 흑교리 등의 움무덤에서도 발견되었다.
낙랑의 귀틀무덤이나 벽돌무덤 등에는 목관의 겉면을 오수전 문양으로 장식하거나 오수전 모양의 옥 장식품이 부장된 것으로 보아 당시 중국 화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환인과 집안 일대 및 평양 등에 있는 고구려의 성터와 무덤, 주거지 및 취락, 매납유적 등에서도 산발적이지만 오수전이 출토되고 있다.
장군총 부근의 매납유적과 자강도 심귀리 적석묘(1점), 강동군 만달산 석실묘(1점), 박천군 덕성리 전곽분(38점), 안악궁터(8점), 낙랑구역 돌칸흙무덤(1점), 연천군 호로고루성(1점) 등지에서도 출토된 사례가 알려져 있다.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주로 해안과 내륙의 강변을 따라 초기 국가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20여 곳의 유적에서 1,060여 점이 출토되었다. 삼한의 것으로는 여수 거문도 퇴장유적(980점)과 인천 운남동 패총(1점), 운북동 주거지(20점)를 비롯하여 강릉 초당동(2점), 춘천 율문리(2점), 사천 늑도 패총(1점), 제주 산지항 유적(4점)과 같은 생활유적지나 패총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분묘유적인 경산 양지리 목관묘(26점), 임당 고분군(4점), 영천 용전리(3점), 창원 다호리 고분군(3점) 등에서 출토되었고, 서울 풍납토성(1점)에서도 발굴되었다. 특히, 삼국시대 공주 무령왕릉(90점)에서는 양 무제 때 제작된 철제오수전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오수전이 실제 화폐로 유통된 것이라기보다는 분묘에 부장하는 위신재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와 신라의 절터에서도 오수전이 출토되고 있다. 부여 왕흥사지(3점)와 경주 황룡사지(1점) 목탑의 심초석 주변과 경주 분황사(1점) 모전석탑에서 북제(北濟)에서 주조한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사리공양 의식을 행하는 종교적 의미에서 다른 공양품들과 함께 탑에 매납된 것이다.
이처럼 초기 국가시대인 서기전 2세기 말 이후 한반도에 유입된 오수전은 각종 생활유적이나 분묘뿐만 아니라 7세기 전반 무렵의 절터에 이르기까지 30여 곳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전한 시기의 오수전은 대부분 정치적 목적의 교섭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최근에는 출토 수량과 양상 등으로 볼 때 일상적인 교역에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연구도 있다.
한반도에서 오수전이 출토되는 중심 지역의 변화와 출토 범위의 확대, 무덤 부장품으로서 기능 상실과 사리 공양품으로 매납되는 현상 등으로 보아, 상품 거래 수단의 교역 매개물, 위세품, 분묘 부장품, 의례용 등으로 시기에 따라 그 성격과 의미가 변화되며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수전은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의 각 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주조, 사용되었으므로 글자의 서체와 크기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화폐의 제작과 사용 연대에 대한 기준이 되므로 유적에서 공반된 유물에 대한 절대연대를 추정하는 양호한 역연대(歷年代) 자료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