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총 ()

선사문화
유적
중국 지린성 집안시 통구분지 우산하고분군에 있는 고구려시대 5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계단식 돌방 돌무지무덤.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
건립 시기
5세기 전반경
관련 국가
고구려
관련 인물
광개토왕|장수왕
측면 길이
30.15~31.25m
높이
13.07m
소재지
중국 지린성 집안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장군총(將軍塚)은 중국 지린성 집안시 통구분지 우산하고분군에 있는 고구려시대 5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계단식 돌방 돌무지무덤이다. 가장 발달된 기술로 축조된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한 변 길이 30.15~31.25m, 잔존 높이 13.07m 규모이며 묘역과 담장 시설이 있다. 무덤 주변에 딸린무덤 2기와 제대, 서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서 능묘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무덤은 5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광개토왕릉 또는 장수왕릉으로 비정된다. 200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의
중국 지린성 집안시 통구분지 우산하고분군에 있는 고구려시대 5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계단식 돌방 돌무지무덤.
발굴경위 및 결과

중국 지린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의 통구분지(通溝盆地) 우산하고분군(禹山下古墳群)의 동쪽에 자리하는 고구려시대 계단식 돌방 돌무지무덤이다. 통구분지의 돌무지무덤 가운데 가장 발달된 기술로 축조된 장군총은 잘 보존되어서 돌무지무덤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은 통구분지의 커다란 돌무지무덤을 왕의 무덤으로 이해하였고, 1907년 프랑스 학자 샤반느(Emanue Edouard Chavannes)는 통구 일대 조사 당시 장군총의 무덤 칸에서 시골 사람들이 모셨던 나무로 만든 패에 ‘호태왕(好太王)의 자리’란 글을 보고서 호태왕의 무덤으로 기록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09년 일본 관학자들이 조사한 사진에는 무덤 위에 수목이 무성하지만, 현재는 벌목하여 계단상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장군총을 동방의 금자탑으로 이해하였고, 당시 현지 주민들은 장군총이라고 불렀다.

1966년에 통구분지 고분을 정리 · 조사하면서 중국 정부에서는 1966년 우산하1호분(JYM001)으로 편호하여 장군총으로 부르고 있다. 2005년 국내성 시기의 고구려 왕릉으로 통구분지의 초대형 돌무지무덤들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장군총은 집안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7.5㎞ 떨어진 용산(龍山) 남쪽 능선의 평탄면에 단독으로 자리한다. 장군총으로부터 남쪽으로 1.5㎞ 떨어져 임강총이 있고, 서남쪽으로 2㎞ 떨어져 광개토왕릉비태왕릉이 있다.

무덤의 규모는 현재 각 변의 길이는 동변 30.15m, 남변 30.75m, 서변 31.1m, 북변 31.25m로, 방형 평면이며, 남아 있는 높이는 13.07m이다. 무덤 주변의 딸린무덤 2기와 제대(祭臺)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부석 시설, 그리고 무덤 주위를 돌아가는 담장과 무덤의 서남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능사로 추정되는 건축지가 조사되었다.

형태와 특징

무덤은 지면을 파서 기초 시설을 한 후 축조하였다. 기초 시설은 지면을 파고, 그 내부에 냇돌을 뉘어서 채워 넣고 그 위에 산돌을 올리고 다시 냇돌을 뉘어 쌓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기초 시설의 높이는 1~1.2m 정도이다. 기초를 다진 후 커다란 지댓돌을 놓았고, 그 위에 기단석(基壇石)을 가지런하게 쌓아 기단부를 만들었다.

기단부는 한 변 길이 32.3m 내외이며, 기단 밖으로 둘레를 돌아가면서 두께 1016㎝인 커다란 냇돌을 돌렸는데, 기단을 돌아가는 둘레석은 폭 34m이다. 이 위에 잘 다듬은 거대한 화강암 장댓돌은 3~4단 쌓아 계단을 조성하였다. 무덤 바닥 주위를 돌아가면서 너비 30m 전후로 강돌을 깔았는데, 무덤의 서남쪽 30m 거리에서 돌로 쌓은 담장으로 보아 묘역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계단 분구는 제1층 계단을 조성하고 내부를 냇돌과 산돌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총 7층의 계단을 축조하였다. 아래쪽 계단석의 크기는 보통 길이 2.4~3.5m, 두께 0.9m 전후로 가장 큰 것은 길이 5.7m, 너비 1.12m에 이른다. 모든 계단석은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게 가공하였는데, 가장자리에 턱을 만들어 위쪽 계단석이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계단 둘레에는 커다란 보호석을 각 면마다 3개씩 세워 놓았고, 각 층의 계단을 안으로 1m 정도 들여쌓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계단 축조에 사용된 장댓돌은 모두 1,177매인데, 현재 31매가 없어져 1,146매만 남아 있다.

7층 계단 위 정상부의 높이는 지표에서 13.07m인데, 백회(白灰)를 섞은 흙으로 봉하였다. 정상부 가장자리 계단석의 윗면에는 둥근 홈이 일정 간격으로 파여 있는데, 철제 연결고리의 출토 양상으로 보아 목조 건축물이나 구조물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 주체부는 굴식 구조의 돌방이며, 제3층 계단 위에 널방의 바닥이 자리하고 널길의 입구는 5층에 있다. 널방의 한 변은 543~550㎝로서 거의 정방형이며, 높이는 510㎝로서 잘 다듬은 장댓돌을 안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6단으로 쌓아 올렸다. 평행고임을 한 다음 거대한 천장석 1매로 윗부분을 덮었다.

바닥에는 널돌을 깔고, 길이 320325㎝, 너비 130145㎝, 높이 3845㎝인 널받침 두 개를 50㎝ 간격으로 놓았다. 입구는 제5층 계단에 위치하여 널길이 아래쪽으로 경사져 있는데, 잘 다듬은 장댓돌로 길이 830㎝, 너비 200275㎝, 높이 140~220㎝인 널길을 조성하였다.

무덤 주변에는 딸린무덤 2기와 제대로 불리는 석축 시설, 그리고 무덤 서남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제사 건물로 추정되는 건축지도 확인되었다.

1호 딸린무덤은 장군총 동북 모서리에서 43m 떨어져 있으며, 한 변 9.22m, 높이 4.72m로 규모는 작지만 축조 방식은 장군총과 거의 동일하다. 2호 딸린무덤은 1호 딸린무덤 서북쪽 35m 거리에 자리하는데, 한 변 9.57m로 계단의 일부와 그 아래 기단부만 남아 있지만 축조 양상은 장군총과 거의 동일하다.

제대는 길이가 긴 장방형 평면의 석축 시설로, 2호 딸린무덤의 서북쪽에 인접해 있다. 길이 58m, 너비 8m, 높이 0.3~0.8m이며, 둘레에 다듬은 돌로 단을 쌓고 그 내부를 냇돌과 깬돌로 채워서 축조 방식은 돌무지무덤의 기단 축조와 비슷하다.

건축지는 장군총의 서남쪽 100m 거리에서 확인되었다. 남북 길이 100m, 동서 너비 40m 내외 규모의 건축지로 담장, 문이 있던 자리,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다. 여기서 붉은색 기와와 와당(瓦當) 등이 출토되어서 장군총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장군총에서는 일찍이 연꽃무늬기와와 기왓조각 · 철제 연결고리 · 금동제 비녀채자 등이 출토되었는데, 최근 발굴 과정에서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장군총 남측 흙더미에서 금동제 머리장식, 철제 연결고리, 연꽃무늬기와, 암키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1 · 2호 딸린무덤에서는 연꽃무늬기와와 각종 기왓조각을 비롯하여 철제 끌 · 집게 · 정 · 칼 · 말편자 등이, 제대에서는 순금제 귀걸이와 바닥에 못이 있는 금동제 신발 · 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기왓조각 가운데 ‘小’, ‘魚’, ‘十’, ‘申’, ‘大’ 등의 명문(銘文)이 새겨진 경우도 있다.

의의 및 평가

장군총은 돌무지무덤 축조 기술상 가장 완성된 형식으로, 그 축조 양상이나 딸린무덤으로 보아 왕릉임에는 이견이 없다. 구릉에 자리하여 산상왕릉(山上王陵)으로 비정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국내성에서 마지막으로 사망한 광개토왕이나 즉위한 장수왕의 왕릉으로 비정한다.

고구려에서 수릉제(壽陵制)가 시행되었다고 보는 중국 학자들은 대부분 장수왕릉으로 비정한다. 우리나라와 일본 학자들은 태왕릉 및 광개토왕릉비와의 관계에 따라 광개토왕릉 또는 장수왕릉으로 비정하며, 최근 남한 학계에서는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조금 우세하다.

장군총 이후의 왕릉으로서 돌무지무덤은 국내 도성 일대에서는 확인되지 않아서 장군총 이후 고구려왕릉은 돌방 봉토분 또는 사신이 그려진 돌방 봉토벽화분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강현숙, 『고구려고분연구』(진인진, 2013)
張福有, 孫仁杰, 遲勇, 『集安高句麗王陵通考』(香港亞洲出版社, 2007)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集安高句麗王陵』(文物出版社, 2004)
藤田亮策, 『朝鮮考古學硏究』(高桐書院, 1948)
『通溝』(日滿文化協會, 1938)

논문

俊杰, 馬健, 「高句麗太王陵墓主壁“廣開土王”設的反思」(『考古與文物』 第3期, 2015)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將軍墳西南建築遺址的考古發掘」(『邊疆考古硏究』 10, 2011)
宋娟, 耿鐵華, 「高句丽将军坟的陪葬墓」(『北方文物』 4, 2008)
魏存成, 「集安高句丽大型积石墓王陵」(『社會科學戰線』 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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