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린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소속의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석비로서, 고구려의 제20대 장수왕(長壽王, 394491, 재위 412491)에 의해 건립되었다. 광개토왕릉비(이하 능비)의 구체적인 위치는 압록강 중류의 북한 만포진(滿浦鎭)에서 마주 보이는 통구분지(通溝盆地) 일대이며, 고구려의 평지 도성이었던 통구성(通溝城)에서 동북쪽으로 약 4.5㎞ 지점인 태왕촌대비가(太王村大碑街)에 서 있다.
1928년 이래로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碑閣)이 두어지기도 하였는데, 현재는 대형 석조 비각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사방을 방탄유리로 막아서 외부인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능비는 광개토왕(廣開土王, 374412, 재위 391412)이 묻힌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능비의 서남쪽 약 400m 지점에는 왕릉급 무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태왕릉(太王陵)이 있으며, 능비의 동북쪽으로 약 1.7㎞ 지점에는 구조적으로 국내성 도읍기의 가장 늦은 시기에 조영된 왕릉급 무덤인 장군총(將軍塚)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장군총이 광개토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많다.
구체적인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능비문에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에 왕릉으로 시신을 옮기면서 비를 세웠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414년(장수왕 3)으로 볼 수 있다.
능비에 대한 명칭은 여러 가지인데, 광개토왕의 사후에 그의 공적을 기록하였다는 점,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의 무덤 인근에 세웠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광개토(대)왕릉비’, 혹은 ‘광개토왕비’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광개토왕’이라는 왕호 대신, 능비문에 보이는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을 줄여서 ‘호태왕비(好太王碑)’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능비는 자연석을 채취한 뒤 다듬어서 세운 사면비(四面碑)로서 재질은 강력 응회암이며, 건립 당시의 모습 그대로 현재의 위치에 서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는 동쪽으로 45도 정도 치우친 동남향 방향으로 서 있으며, 높이는 약 6.39m에 달한다. 제작 당시 글자의 크기와 간격을 균일하게 하기 위해 네 비면의 가장자리에 외곽선을 그리고, 그 안에 세로로 약 13㎝ 간격의 괘선들을 그어 공간을 구획한 뒤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1면 11행, 2면 10행, 3면 14행, 4면 9행의 총 44행에 걸쳐 글자들이 음각(陰刻)되어 있으며, 글자 형태는 예서(隸書)에 가깝다. 총 글자 수는 원래 1,775자 정도였다고 추정되나, 그 가운데 최소 140여 자 이상이 자연적인 손상 내지는 후대의 인위적 파손으로 인해 현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능비는 고구려 멸망 이후 한동안 문헌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15세기 중반 조선 세종 때 지어진 악장(樂章)인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39장 압강(鴨江) 주해(註解)에 처음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쪽 강 건너에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는 금(金) 황제의 성(城)이고 북쪽 7리 떨어진 곳에는 비(碑)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지역이 바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집안분지) 일대로서 금 황제의 성으로 오인된 것이 바로 고구려의 옛 평지 도성이며, 북쪽 7리에 있는 비가 바로 광개토왕릉비를 가리킨다고 본다.
또한, 1596년에 조선의 한성부 남부주부(南部主簿)로 있던 신충일(申忠一)이 건주(建州)의 누르하치(Nurhachi)가 있는 성에 다녀와서 쓴 견문록인 『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이 책에는 현재 집안 지역의 고구려 유적들을 표시한 지도가 남아 있는데, 옛 고구려의 도성과 장군총, 그리고 능비로 추정되는 ‘비(碑)’가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조선 전기부터 능비의 존재가 인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집안 일대에 남아 있는 성곽과 무덤들, 그리고 석비를 12~13세기에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의 유적 · 유물로 여겼다.
게다가 명나라의 감시로 인해 압록강 이북 지역에서 자유로이 활동하기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까지도 문인들은 능비에 깊은 관심을 가지거나 그 글자들을 제대로 판독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자연히 고구려에서 건립하였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17세기 중반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였는데, 청 조정은 한족들이 자기들의 기원이 있는 신성한 만주 지역에 무분별하게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봉금(封禁) 조치를 내렸다.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까지 사람이 거의 살지 않게 되었고, 이는 능비가 뒤늦게 발견된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1880년을 전후하여 청나라가 만주 일대에 내린 봉금 조치를 해제하면서 이 지역에 회인현(懷仁縣)을 정식 설치하고 사람들이 들어와 살도록 하였는데, 이후 한 농부가 능비를 발견하여 현으로 신고를 하였다. 이에 회인현의 설치위원(設治委員)이었던 장월(章越)이 휘하의 관월산(關月山)이라는 사람을 시켜 이를 조사하게 하였다.
당시 능비의 표면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비를 뒤덮고 있는 덩굴과 비면에 붙은 이끼를 완전히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는데, 회인현의 지시에 의해 이러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일부 작업자들이 비의 표면에 말똥을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린 뒤 그것에 불을 지르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열이 가해진 능비의 몸에 균열이 가고 일부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등 심각한 손상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관월산(關月山) 등에 의해 제작된 부분적인 탁본들이 금석문 애호가 등에게 소개되면서 능비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북경(北京)의 금석학계에서 능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차 생겨났고, 1882년(광서 8) 즈음에는 청나라의 금석학자 · 서예가들이 능비의 탁본들을 입수하기도 하였다. 다만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탁본 여건의 미비 등으로 인해 비면의 일부만 탁본을 하거나, 글자의 윤곽을 모사(摹寫)하고 빈자리에 먹을 칠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 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3년경에 일본 참모본부 소속으로 스파이 임무를 띠고 집안 지역을 지나던 사코가게노부〔酒匂景信〕 중위가 능비를 발견한 뒤, 곧바로 묵수곽전본 형태의 탁본을 구하여 일본으로 보냈다.
이후 일본에서는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하여 비문에 대한 기초적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이라는 잡지에 능비의 전체 판독문과 여러 논문들이 실리면서 비문의 내용이 대외적으로 큰 조명을 받게 되었고 관련 연구도 본격화되었다.
한편 능비의 탁본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인근에 거주하면서 탁본 제작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후대에 이름이 확인된 초천부(初天富) · 초균덕(初均德) 부자는 능비의 표면을 고르게 하고 탁본의 글자들을 더욱 선명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1902년 무렵부터 비 표면에 석회를 발랐으며, 심지어 일부 글자들을 임의로 수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석회를 바른 뒤 찍어 내는 ‘석회 탁본’은 일부 글자의 형태가 변형되는 결과를 가져왔기에 훗날 연구에 활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이처럼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을 제작하는 실상에 대해서는 이미 1913년에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을 조사하였던 세키노타다시〔關野貞〕나 이마니시류〔今西龍〕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그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 이후 1959년에 미즈타니데지로〔水谷悌二郞〕도 능비를 연구할 때 석회에 의해 비면이 가공되기 이전에 제작한 원석 탁본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였다.
한편 1972년에는 재일(在日) 역사학자 이진희(李進熙)가 여러 종의 능비 탁본과 사진 등을 비교 · 검토한 끝에 일본 참모본부가 의도적으로 비면에 석회를 발라서 왜(倭)의 한반도 활동과 관련한 일부 글자들을 변조하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에 따르면 능비의 탁본을 일본에 처음 보냈던 인물인 사코가게노부가 탁본 제작 과정에서 몇몇 글자들을 의도적으로 고쳤으며, 1900년 전후에는 일본의 육군 참모본부가 사코의 글자 조작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를 도포하여 글자를 고치는 ‘석회 도포 작전’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진희의 주장은 일본학계의 연구 성과들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과 더불어 과거 일본에서 참모본부 주도의 능비 연구가 이루어진 것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능비를 둘러싼 논란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면서 중국 현지의 연구자들도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1981년부터 현지에서 연구를 진행한 왕건군(王健君)에 의해 능비의 발견과 탁본이 만들어지는 과정 등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그는 집안 현지에서 능비의 실측과 판독 작업 이외에도 현지인들과의 인터뷰와 문헌 기록에 근거하여서 비면에 석회를 칠한 이들은 현지의 탁본 제조업자인 초천부 · 초균덕 부자였다는 점, 이들이 석회를 바른 것은 단지 비면을 고르게 하고 보다 선명한 탁본을 얻기 위한 것이었을 뿐, 역사 왜곡을 의도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결론적으로 석회 도포는 일본 참모본부의 소행이 아니라는 점 등을 주장하였다.
이후에도 탁본에 대한 연구와 현지 조사 등이 진행되면서 비문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근거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연구들이 잇따라 나왔고, 이에 따라 현재는 비문에 석회를 바른 행위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보는 연구자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한편 ‘석회 탁본’의 문제점이 적극 거론되면서 1980년대부터 비면에 석회를 바르기 전에 만들어진 탁본, 즉 ‘원석 탁본’들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현재 중국 베이징〔北京〕 대학 도서관 도서들과 대만(臺灣) 부사년(傅斯年) 도서관 도서, 일본의 미즈타니데지로본과 가네코오테이본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임창순본, 서울대학교규장각 도서, 혜정박물관 도서 등이 있다. 현재도 능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비문의 글자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원석 탁본을 중심에 두는 가운데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1부는 시조인 추모왕(鄒牟王)이 북부여(北夫餘) 땅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에 도읍을 두고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 설화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유류왕(儒留王)과 대주류왕(大朱留王)을 거쳐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즉 광개토왕으로 왕실의 계보가 이어졌다는 점, 그리고 광개토왕의 생전 업적에 대한 찬양과 더불어 갑인년(甲寅年)인 414년 9월 19일에 왕이 승하한 뒤 시신을 왕릉으로 옮기면서 비를 세워 왕의 공적을 적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능비문의 건국 설화와 왕실 계보에 대한 내용은 하늘의 자손인 고구려 국왕의 신성성과 통치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능비문 서두의 건국 설화 부분은 2012년에 중국 집안시 마선구(麻線鄕)에서 발견된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이하 집안비)에서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발견된다. 광개토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의 도입부(제1행)에는 시조 추모왕이 왕조를 창업하였다는 내용, 그리고 추모왕께서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자손으로서 신령의 보호와 도움으로 나라를 건국하고 강토를 개척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능비와 집안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건국 설화의 내용은 고구려 왕실에서 늦어도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에는 공식적으로 추모(주몽)를 기원으로 하는 건국 설화를 확립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또한, 능비문에 나오는 건국 설화의 내용은 시조 추모왕으로부터 유류왕(儒留王)과 대주류왕(大朱留王)을 거쳐 17세손인 광개토왕으로 왕실의 계보가 이어졌음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건국 시조로부터 광개토왕까지 이어지는 일원적인 왕실 계보와 ‘태왕(太王)’으로 상징되는 지배자의 정치적 권위가 확립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당시의 고구려는 초창기 5부(部) 연합 형태의 분권적 지배 구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중앙집권적 지배 구조를 갖춘 가운데 강화된 왕권과 통합된 국가 이념을 갖춘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능비문의 제2부는 ‘널리 영토를 개척하였다〔廣開土境〕.’라는 시호의 문구처럼 생전에 활발한 군사 원정을 통해 주변으로 고구려의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던 광개토왕의 정복 사업에 대해 기록한 부분이다. 정복 기사는 형식상 8개 기년기사(紀年記事)를 연대순으로 나열하고 있는데, 비문의 내용과 연구 쟁점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부분은 내용상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는 영락 5년에 광개토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 등을 지나 염수(鹽水)가에 이르러 패려(稗麗) 3부락의 600∼700영(營)을 격파하고 수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는 내용이다. 패려의 정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요서 지역인 현재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 생활을 했던 거란 일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후반부는 국왕이 패려를 정벌한 뒤 회군하면서 양평(襄平: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요양시 일대)을 중심으로 뻗은 교통로를 거쳐 동쪽으로 역성(力城) · 북풍(北豊) 등 요동반도 서부 일대의 영토를 순수(巡狩)하고 수도로 귀환하였다는 내용이다.
영락 5년 기사 뒤에는 보통 ‘영락’이라는 연호를 제시한 다른 기사들과는 형식을 달리하는 문구(32자)가 있다. 첫 부분은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에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라고 시작되며, 이어서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羅以爲臣民(이왜이신묘년래도□파백잔□□□라이위신민)”이라는 기록이 이어진다.
이른바 ‘신묘년조’라고도 부르는 이 구문은 20세기 초 이래로 일본 연구자들이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격파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해석을 제기한 이래로 능비문 연구의 최대 쟁점이 되었다.
현재 이 기사의 판독과 해석에 대한 논의는 완전한 결론이 나왔다고 보기 어려우며, 구체적으로 신묘년의 활동 주체를 왜 혹은 고구려로 보는 해석들이 다양하게 제기된 상태이다.
다만 최근까지의 연구에서 주목할 점은 이 기사는 신묘년이라는 특정 연도에만 일어난 사건을 제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며, 문맥상 이후에 이어지는 영락 6년, 그리고 그 이후에 진행된 고구려의 남방 원정의 명분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하는 문장으로 보는 가운데 비문 전체의 문맥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이 기사는 고구려 측이 남방 원정에 나서게 된 정당한 이유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상당히 과장된 정보를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불과 20여 년 전인 371년 겨울에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하게 만든 일이 있었기에, 이러한 백제를 예전의 복속민(舊是屬民)으로서 조공을 바쳐 온 존재였다고 설정한 신묘년 기사의 내용은 그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신묘년의 활동 주체를 고구려로 보든, 왜로 보든 간에 그 기록의 사실성 여부보다는 고구려가 자신들의 남방 원정을 어떤 논리로 정당화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논의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신묘년조의 기록을 근거로 왜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복하고 그곳을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는 견해도 현재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 해에는 광개토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58성 7백 촌을 공격해 쳐부수고, 지금의 한강인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백제의 도성에까지 다다랐다고 한다. 이에 궁지에 몰린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광개토왕에게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고 항복하였으며, 고구려군은 많은 포로와 인질, 그리고 세포(細布)를 받아서 개선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사에서는 특히 광개토왕이 쳐부순 58성의 명칭들이 일일이 기재되어 있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임진강 유역에서 남쪽으로 한강 이북에 이르는 범위에 있던 것으로 보기도 하며, 혹자는 위의 범위에 더하여 남한강 상류 유역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때 광개토왕의 승리는 371년 10월에 고국원왕이 평양성까지 북진해 온 백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이래로 다시금 고구려가 백제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다만 비문에서는 광개토왕이 빼앗은 58성이 마치 영락 6년(396) 한 해에 모두 얻은 것처럼 되어 있으나, 실상은 392년부터 396년까지 5년간의 성과들을 영락 6년조에 합쳐서 기재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해에 고구려군의 정복 대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초기에는 해당 부분의 글자가 명확하게 판독되지 않았던 관계로 다소 논란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연해주 일대의 숙신(肅愼)이나, 강원도 일대의 예(濊), 혹은 신라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다만 최근에는 탁본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판독이 좀 더 분명해졌고, 이를 근거로 그 정복 대상을 숙신이라고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이 해에 광개토왕은 소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숙신의 영토를 살피고, 막□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3백여 명을 포로로 잡아오게 하였다. 이러한 군사 활동이 이루어진 이후 숙신이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정사를 논의하여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해에는 전투가 일어났다는 기사는 없으며, 고구려가 신라와 가야 일대에서 본격적으로 군사 활동을 하기 직전에 벌어진 상황들을 소개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이전에 광개토왕에게 했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호하는 일이 발생하자, 왕은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내려갔다. 이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왜인들이 쳐들어와 국경에 가득하며, 성지(城池)를 파괴하고 있으니 구원을 해 달라고 요청해 왔고, 이에 대해 광개토왕은 그 충성을 기리어 사신을 돌려보내며 특별히 대응할 계책을 일러 주었다고 전한다.
이 해의 기사는 판독되지 않는 글자들이 많아서 정확한 사건 전개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영락 9년에 있었던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의거해 이듬해인 영락 10년에 광개토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왜, 혹은 왜와 가야 연합군을 격퇴함으로써 신라를 구원하였고, 이 원정의 결과로 신라 국왕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조공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보통 연구자들은 이때 고구려군의 남하로 인해 김해의 금관가야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는 가야 세력의 주도권이 대가야(고령)로 넘어가는 주된 계기였다고 본다.
비문에 따르면 이 해에 왜군이 고구려의 대방계(帶方界)에 침입하였고, 이에 광개토왕이 몸소 군을 이끌고 나아가 이를 격파하고 무수한 왜구를 참살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왜가 앞의 영락 10년(400)조에 나오는 왜와 동일한 정치세력인지 여부에 대해서 의심하는 견해들도 있다. 또한 왜가 대방계, 즉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출몰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원래 이 공격을 주도한 것은 백제이며 왜가 여기에 참전해서 활동하였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이 해에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적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갑옷 1만여 벌을 빼앗았으며, 사구성(沙溝城) · 루성(婁城) 등의 여러 성을 격파하였다고 전한다. 글자가 판독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아서 이때 격파한 대상국을 백제로 보거나, 혹은 후연(後燕)으로 보는 의견도 제기되었는데, 현재는 백제로 보는 연구자가 많은 편이다.
비문에 따르면 동부여(東夫餘)라는 세력은 시조인 추모왕 대에 이미 고구려에 복속해 있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이에 광개토왕이 몸소 출정하여 정벌에 나섰는데, 동부여가 크게 놀라 항복하였고,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은택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이때의 동부여는 285년경에 지금의 지린시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부여국이 모용씨 세력에게 일시적으로 멸망하면서 그 주민 일부가 북옥저 일대(두만강 유역에서 연해주 일대)로 옮겨가 자리잡은 데서 기원한 세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추모왕 대는 동부여가 성립하기도 이전인데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세력이 미약해서 두만강 일대를 영향력 하에 넣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동부여가 추모왕 대에 고구려에 복속해 있었다는 비문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고구려가 이처럼 과장된 역사상을 제시한 것은 광개토왕 대에 동부여를 정벌한 정당한 명분을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비문의 서술이 반드시 사실에만 근거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영락 20년 기사의 뒤에는 광개토왕이 공파한 지역이 모두 64성 1,400촌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문에서 언급한 영락 5년부터 영락 20년까지의 대외 원정을 통해 확보된 모든 영토를 포괄한 숫자이다.
다만 여기서 언급된 64성 1,400촌에서 영락 6년에 백제로부터 얻었다고 하는 58성 700촌을 제외하면 단지 6성 700촌만 남을 뿐이다. 과연 이것이 광개토왕이 군사 활동을 통해 확보한 모든 지역들을 포함한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도 있다.
특히 비문에는 광개토왕 대에 서북쪽의 후연과 치른 전투와 요하 유역으로의 진출 상황이 기재되지 않았다고 보인다. 이에 대해서 능비를 세웠던 장수왕 대에는 고구려가 남방 진출을 꾀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 정책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비문에 대중국 관련 전쟁 기사가 삭제되고, 남방 원정에 편중된 내용이 구성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 문제는 현재까지 명확하게 해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한편 제3부에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라는 표현과 함께 왕릉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수묘인들의 목록이 기재되어 있다. 이 목록에는 각각의 지역명과 그곳에서 징발될 수묘인들의 가호(家戶) 수가 적혀 있다. 수묘인들은 여러 지역에서 가호 단위로 징발되어 국내성으로 이주된 주민들로 보이며, 국가는 이들이 장기적으로 거주하면서 수묘 임무를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거처할 집과 경작할 토지 등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수묘인들은 크게 광개토왕 이전에 복속된 피지배민인 ‘구민(舊民)’과 광개토왕 대에 새롭게 고구려민으로 편입된 ‘신래한예(新來韓穢)’ 두 집단으로 편성되었고, 이들은 또다시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으로 구분되고 있다.
수묘인 가운데 ‘구민’ 집단은 국연이 10가(家), 간연이 100가이며, ‘신래한예’ 집단에는 국연이 20가, 간연이 200가가 배정되어 있다. 따라서 ‘구민’은 총 110가, ‘신래한예’는 총 220가로 양자의 비율은 1:2이며, 국연은 총 30가, 간연은 총 300가로서 양자의 비율은 정확히 1:10을 이루고 있다.
한편 수묘인연호의 목록에 뒤이은 구문에서는 총 330가나 되는 수묘인연호를 징발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원래 광개토왕은 생전에 자신이 몸소 정복 활동을 통해 확보한 옛 백제 지역 출신의 한인과 예인들(신래한예)로 왕릉의 수묘인을 구성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신래한예’ 수묘인들의 출신지를 보면 그 가운데 상당수가 영락 6년(396)에 있었던 광개토왕의 백제 원정 때 정복하였던 지역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즉위한 뒤에 ‘신래한예’ 출신들이 규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서 ‘구민’ 출신의 수묘인 110가를 추가로 배정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에 원래 배정되었던 신래한예 220가에 구민 110가를 합쳐 도합 330가가 징발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330가의 수묘인연호가 모두 광개토왕릉에만 해당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한 왕릉에만 배정되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라는 점 등을 들어, 국내성 지역에 있는 모든 왕릉의 수묘를 담당하는 수묘인연호의 총합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어서 비문에는 광개토왕이 ‘차착(差錯)’이라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조상 왕의 무덤들마다 석비를 세우고 수묘인연호 목록을 새기는 조치를 해서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고 전한다. 집안비에서도 “(광개토왕 대에) 각 선왕들의 능묘 곁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두(烟戶頭) 20명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한다.”라는 구절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광개토왕릉비문에서 ‘차착’의 방지를 위해 조상왕의 무덤들 주변에 석비를 세운 것과 같은 조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석비를 세우고 그 연호의 목록을 새겨둔 것이 제도의 운영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해명이 제시되지 않았다.
한편 위 기록에 이어서 비문에는 지금 이후로 수묘인들에 대한 매매를 더 이상 금지한다는 법령을 기재하였다. 이 역시 집안비에 거의 유사한 형태의 법령이 나와 있어서 이미 광개토왕 대부터 수묘인과 관련한 모종의 매매가 제도 운영에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수묘인연호와 관련된 기록은 4~5세기의 고구려의 사회상과 지방 통치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생생한 자료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세기 말에 재발견된 광개토왕릉비문은 사료가 부족한 4~5세기 고구려의 정치 · 사회사와 더불어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일대 여러 세력들의 정세도 함께 살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료로서 근대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각국 연구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특히 당시 고구려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진술된 역사상은 그들이 독특한 천하관(天下觀)을 통해 주변 세계를 인식하는 가운데 대외적으로 자국의 위상을 확립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점은 후대에 기록된 다른 문헌 사료들을 통해서는 얻기 어려운 정보이기 때문에 당대의 사료인 능비가 갖는 사료적 가치는 단순하게 형언하기 어렵다.
다만, 능비는 고구려 때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동아시아 각국의 정치 · 외교적 이해관계와 현실적인 목적 하에 이용된 측면이 있다. 20세기 초 일본은 군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연구에서 능비문이 왜의 한반도 진출을 입증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으며, 능비를 아예 일본으로 반출하여 제실박물관(지금의 도쿄국립박물관)에 진열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도 있었다. 고대에 일본(왜)이 한반도에 진출하였던 역사적 상징물을 일본 국민들에게 직접 보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도 근대 이래의 능비 연구는 ‘한민족’의 압도적 우위와 일본(왜)에 대한 승리를 입증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인식은 능비문의 역사적 실상에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데 일정한 장애가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1960년대 이래로 대한민국 · 중국 · 일본에서는 과거 일본 참모본부에 의해 주도되어 온 광개토왕릉비 연구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능비문의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 당시 역사상에 접근하려는 다각적인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텍스트를 통해 명확한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현실의 정치 · 외교적 이해관계나 편향적인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며, 더 나아가 당시 비를 세운 주체인 고구려 왕실과 지배층의 정치 · 사회적 입장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를 비문 속에서 어떤 논리로 구현하고자 했는지를 먼저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한편 2012년에 집안비가 발견된 이후 수묘제를 비롯한 능비문에 대한 연구도 더욱 심화되고 있다. 현재 집안비는 불완전한 판독 문제와 더불어 비의 건립 시기, 건립 목적, 능비의 수묘인연호조 내용과의 차이점 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광개토왕릉비문의 설명대로 역대 선왕들의 왕릉에 비석을 건립한 것이 광개토왕 대부터였다면 집안비 역시 이때 여러 왕릉 옆에 세워진 수묘인연호의 명단을 기재한 비들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집안비의 건립 목적에 대해서는 수묘인연호의 명단을 적은 것이 아니라, 광개토왕 대에 이루어진 수묘제의 개편 및 법령을 공시하기 위해 세운 비라는 의견도 있기 때문에 아직 건립의 의도를 단정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향후 집안비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이해도 더욱 깊어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