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高質, 626~697)에 대한 기록은 문헌 사료에는 보이지 않으며, 당에서 출토된 묘지명에만 보인다. 1923년에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陽市〕의 북쪽에서 고질의 아들인 고자(高慈)의 묘지명이 먼저 출토되었는데, 여기서 고자의 부친을 ‘문(文)’이라고만 지칭하였다. 이에 그동안 고문(高文)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는데, 1990년대에 고질의 묘지명이 출토되면서 그의 이름이 질(質)이고, 자(字)가 성문(性文)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질 · 고자 부자의 묘지명에 따르면, 4세기 당시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의 군대가 고구려에 쳐들어와서 나라가 곧 망할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 고질의 19대 조상인 고밀(高密)이 나서서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공로로 고밀은 고구려왕으로부터 고씨(高氏) 성과 식읍(食邑) 3천 호를 하사받았으며, 고밀의 집안 후손들도 3백여 년간 대대로 높은 벼슬을 받게 되었다.
고질의 증조부와 조부 · 부친도 모두 고구려 조정에서 2품 또는 3품의 고위 관직을 받아서 활동하였으며, 고질 역시 3품인 위두대형(位頭大兄) 겸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질은 고구려 말기에 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형제와 가족들을 데리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당으로 건너간 이후 고질은 주로 군사 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질은 먼저 669년에 종4품인 명위장군(明威將軍)과 종3품인 운휘장군(雲麾將軍)을 차례로 받으면서 도성인 장안(長安)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에는 당나라 변경 지대의 이민족들을 토벌하는 원정에 자주 참여하였는데, 670년에는 서쪽의 토번(吐蕃)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679년경에는 정양도(定襄道) 지역[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북쪽의 영삭현(寧朔縣)]에서 벌어진 돌궐(突厥) 토벌전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포상을 받았고, 690년에는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좌응양위장군(左鷹揚衛將軍)이라는 고위직에 오르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한편, 696년에 요서 지역의 영주(營州)에서 거란족 연맹의 수장인 이진충(李盡忠)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이듬해인 670년에 고질이 청변동군총관(淸邊東軍總管)으로 임명되어 거란 토벌에 나섰다. 그런데 이때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보낸 군대가 대패하면서 유주(幽州) 지역이 함락되었고, 본국과의 연락이 두절된 고질의 군대는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랴오닝시〔遼陽市〕 북쪽에 있던 마미성(磨米城) 인근에 고립되고 말았다. 고질은 수만 명에 달하는 거란군에게 포위당한 채 불과 2천여 명의 군사로 굳건히 버텼지만, 결국 그의 아들인 고자와 함께 거란군에 포로로 잡혀서 697년 죽임을 당하였다.
고구려에서 당으로 건너간 유민 1세대인 고질은 당 조정에서 주로 군사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구축하며 생존하였던 고구려 · 백제 출신 유민들의 처신과 동향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