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富山)이라는 지명은 중국측 사서와 「 광개토왕릉비」에 등장한다. 우선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2세기 후반에 공손도(公孫度)가 요동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신대왕인 백고(伯固)가 병력을 보내 공손도를 도와서 부산의 적(賊)을 공격하여 깨뜨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기사만으로는 부산이 정확히 어느 위치인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당시 고구려가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푸순[撫順] 일대로 비정되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해 있었다는 점, 부산의 적이 대략 공손도의 영역 밖인 서부나 북부에 있던 세력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이 전투는 대략 현도군의 중심인 푸순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북쪽 내지는 서쪽의 어딘가에서 벌어진 군사 작전이었을 것이다.
또한 414년(장수왕 2)에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왕릉비」에는 부산 인근의 지역 이름들이 여럿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395년(영락 5)에 광개토왕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패려(稗麗)를 정벌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때 고구려군은 부산(富山) ·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패려의 3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고 수많은 소와 말, 양을 노획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패려가 있던 지역은 이동할 수 있는 취락인 ‘영(營)’이 존재하였고, 수많은 소, 말, 양을 키웠던 곳임을 감안할 때 전형적인 유목 민족의 주거지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서요하(西遼河) 상류 유역에 거주하던 거란족의 일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의 군대가 그들을 치기 위하여 이르렀다는 염수 역시 서요하 상류의 어느 지점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부산은 『열하지(熱河志)』에 따른 『대원대일통지(大元大一統志)』의 기록에 근거하여 중국 원나라 때의 용산현(龍山縣), 즉 지금의 랴오닝성 객좌현(喀左縣) 일대로 보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 광개토왕이 몸소 정벌에 나서면서 당시 주요 적대세력이었던 후연(後燕)의 수도 서쪽까지 진격한 것이 되므로 현실적이지 않아 보인다.
또한 부산을 랴오닝성 금주시(锦州市) 소속의 북진시(北镇市) 서북 5㎞ 지점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400년 이전까지 고구려가 요하(遼河) 이동 지역을 확실하게 차지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광개토왕이 직접 랴오닝성 요양시의 서쪽 깊숙한 지점에 들어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고구려가 공손도를 도와서 공격하였던 '부산의 적’의 위치는 랴오닝성 푸순시를 기준으로 북쪽의 어느 지점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부산은 푸순에서 북쪽의 서요하 상류로 가는 방향에 있는 개원시(開原市) 혹은 창도현(昌圖縣) 방면으로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