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65~179년이다. 형인 차대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자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산속에 은둔해 있다가, 차대왕이 명림답부에게 살해된 뒤 좌보 어지류 등의 추대로 즉위했다. 최고의 관직이던 좌보와 우보를 통합해 국상이라는 관직을 설치하고 명림답부를 임명함으로써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했다. 왕자 남무를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 부자상속제의 기틀을 마련했고, 재위 기간 동안 후한과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91세로 죽자 고국곡에 장사했다.
재위 165∼179. 이름은 백고(伯固) 또는 백구(伯句). 태조왕의 동생이라고도 하고, 태조왕의 아들 또는 차대왕의 아들이라는 이설도 있다. 영특하며 성품이 인자했다고 한다. 형인 차대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자 장차 변란이 발생해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 산 속에 은둔해 있다가, 차대왕이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된 뒤 좌보(左輔) 어지류(箊支留) 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신대왕이 태조왕과 차대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즉위한 이듬 해인 166년(신대왕 2)에 대사령(大赦令 : 사면하라는 국가 원수의 명령)을 내리고,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을 양국군(讓國君)에 봉하면서 토지를 하사하는 등 반대 세력을 무마하는 데 힘썼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까지 고구려의 최고위직이었던 좌보(左輔)와 우보를 단일화해 국상(國相)이라는 관직을 설치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함으로써 귀족 세력들의 조정 · 통제를 도모하는 등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 지배 체재 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176년 왕자 남무(男武)를 태자로 책봉함으로써 왕위 부자 상속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후한(後漢)과 충돌을 거듭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169년과 172년에 후한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의 침공을 받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 요동군을 공격해 후한의 압박을 분쇄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서방으로의 진출을 계속 추진하였다. 또 169년에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을 파견해, 당시 요동 · 요서 지역에서 신흥 세력으로 등장한 공손탁(公孫度)을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손탁이 독립 세력으로서 등장한 것은 190년 이후이므로, 이것은 후대의 사실이 신대왕 때의 사건으로 잘못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91세로 죽자 고국곡(故國谷)에 장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