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태조 대왕 재위 22년인 74년 겨울 10월에 왕이 환나부(桓那部)의 패자(沛者)였던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古鄒加)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세기 당시 고구려의 국가 성격과 나부(那部), 나(那)의 의미 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고구려가 있던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는 ‘~나(那)’로 지칭하는 여러 독자적인 세력 집단이 있었다. 설유가 정복한 주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며, 사로잡혔던 왕자 을음도 원래 독자 세력이었던 주나의 지배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고구려는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아니라, 단위 정치체인 5개 나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5개 나부의 명칭은 『삼국사기』에 계루부(桂婁部) · 비류부(沸流部) · 제나부(提那部) · 환나부(桓那部) · 관나부(貫那部)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설유도 이 가운데 하나인 환나부 소속이었다. 각 나부는 왕실이 속한 계루부 출신 국왕의 통제를 받았지만, 계루부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공간에 있었으며, 반독자적 관원 조직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정한 자치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설유가 환나부의 패자였다고 하는데, 본래 패자라는 관등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이를 동원할 수 있는 나부의 지배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즉, 설유는 고구려 국왕의 명령에 따라 환나부 소속의 군대를 이끌고 주나를 정벌하였다.
2년 전인 태조 대왕 재위 20년인 72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즉, 이해에 태조가 5나부의 하나인 관나부의 패자 달가(達賈)를 보내 고구려의 통제 하에 있지 않던 세력인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게 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기사들은 1세기 중후반 당시 고구려가 5나부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압록강 중류 유역의 독자 세력을 하나둘씩 통합해 나가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