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본래 중국왕조의 공식 연호였는데, 구체적으로 후한(後漢) 대인 136141년, 동진(東晉) 대인 345356년, 후진(後秦) 대인 416417년, 북량(北涼) 대인 433439년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동진 대의 ‘영화’ 연호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몇몇 무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49년 4월에 황해남도 안악군 유설리에서 발견된 안악3호분 내부에는 무덤의 주인인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묘지(墓誌)가 묵서로 적혀 있다. 이 묘지에는 동수의 사망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그가 영화 13년 10월 26일에 69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표기되어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기록에 의하면 동수라는 인물은 원래 중국의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성립했던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 세력에 있던 관료였는데, 336년에 고구려로 망명해 온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활동 시기 등을 고려하면, 그의 묘지 첫머리에 나오는 ‘영화’라는 연호는 동진 대인 345~356년에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동진의 ‘영화’ 연호가 345년 정월 1일부터 12년간 사용되다가 357년 정월 1일에 승평(升平)으로 바뀌었으며, ‘영화 13년’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13년’이라는 기록은 황해남도 지역으로 옮겨와 살던 동수 일족이 중국과의 교류가 별로 없던 상황 속에서 동진의 연호가 승평으로 바뀐 사실을 10개월 넘게 모르던 상태에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즉, ‘영화 13년’은 본래 '승평 원년'에 해당한다.
영화라는 연호는 평안남도 평양시 평양역 구내에서 발견된 '동리'라는 인물의 무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동수와 마찬가지로 중국계 망명인으로 보이는 그의 무덤에서는 문자가 있는 벽돌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영화 9년'이라는 연호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영화’ 역시 동진의 연호로서 영화 9년은 353년을 가리킨다. 이 외에도 황해남도 신천군 북부면에서 발견된 문자가 있는 벽돌에도 역시 ‘영화팔년(永和八年)’이라는 연호가 발견되었는데 이때는 동진의 연호로 352년을 가리킨다.
4세기 중반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황해도 · 평안도 지역의 무덤에서 중국 연호를 사용한 사례가 발견되는 것은 당시 그 지역에서 거주했던 중국계통 망명인들의 사회 · 문화적 토대가 본래 중국왕조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장례문화에도 그것이 반영된 결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