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幽州)요동군(遼東郡)출신으로 모용황(慕容皝)의 사마(司馬)를 지내던 중 모용황의 동생인 인(仁)을 치는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오히려 모용인에게 붙잡혀 그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336년에 모용황이 기습적으로 모용인을 공격하여 모용인의 세력이 괴멸되자 그는 모용유(慕容幼)·곽충(郭充) 등과 동쪽으로 달아났다. 모용유는 도망가다가 다시 돌아갔고 그는 곽충 등과 더불어 고구려에 망명하게 되었다.
고구려에서의 그의 지위나 소임 등에 대하여는 논란이 되고 있지만, 고구려로부터 상당한 지위를 보장받고 고구려의 한인(漢人) 통치나 전연(前燕)과의 외교교섭 등에 공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묘라고 주장되고 있는 안악3호분의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그는 고구려에서 ‘사지절 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토대방태수 도향후(使持節都督諸軍事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鄕侯)’라는 높고 화려한 관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묵서명이 묘의 구조나 화려한 벽화 등과는 어울리지 않는 형태로 쓰여져 있어 그 무덤이 그의 무덤인지에 대하여는 논란이 되고 있다. ‘동수(冬壽)’라는 묵서명의 표기와는 달리 ≪진서 晉書≫나 ≪자치통감≫에서는 ‘동수(佟壽)’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