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성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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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고구려의 제1대(재위: BCE. 37~BCE. 19) 왕.
이칭
시호
동명(東明)
이칭
고주몽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기원전 58년
사망 연도
BC 19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동명성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BCE.37년~BCE.19년으로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추모왕이라 했다. 이름은 고주몽으로, 천제의 아들인 북부여의 왕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부여 금와왕의 왕자들의 핍박을 피해 졸본으로 가서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세웠다. 이듬해 비류국 송양왕의 항복을 받았고 행인국·북옥저를 정복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기원전 19년 동부여에서 첫 부인 예씨와 왕자 유리가 도망해오자 태자로 삼았다. 그 해 9월에 서거하여 용산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했다.

목차
정의
고구려의 제1대(재위: BCE. 37~BCE. 19) 왕.
내용

재위 기원전 37∼기원전 19. 성은 고씨(高氏).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鄒牟) · 상해(象解) · 추몽(鄒蒙) · 중모(中牟) · 중모(仲牟) · 도모(都牟)라고도 한다. 『국사(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삼국사기』에는 성이 고씨, 이름은 주몽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추모’ 또는 ‘상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모두루묘지에서는 ‘추모왕’이라 하였다.

또한, 백제에서 시조로 모신 동명에 대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등 일본문헌에는 ‘도모(都慕 : 일본음 쓰모)’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일련의 한자(漢字) 표기는 모두 동명을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한편, 중국문헌인 『위략(魏略)』, 『후한서(後漢書)』 부여전, 『양서(梁書)』 고구려전에는 부여의 시조가 동명이라 되어 있다. 그리고 『위서(魏書)』 · 『주서(周書)』 · 『남사(南史)』 · 『북사(北史)』 · 『수서(隋書)』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시조가 주몽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동명을 시조로 모시는 전통은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원래 동명과 고구려 시조 주몽은 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문헌기록만으로 보면 주몽설화와 동명설화는 줄거리가 똑같다. 그 특징은 ‘ 단군(檀君)’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왕자(王者)의 정치적 권위의 원천을 하늘에 귀속시키면서, 농업생산을 좌우하는 ‘물의 신령’의 권위를 아울러 주장하는 새로운 종교사회사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북부여의 왕인 해모수(解慕漱)였다. 이것은 그가 동부여에서 태어났는데도, 고구려 왕실의 법통의 근원을 북부여에 두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주몽의 어머니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柳花夫人)이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정을 통한 뒤 집에서 쫓겨났다. 이 때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유화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가두었더니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치어 태기가 있어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은 그것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에 버려도 소나 말이 피해 갔다. 또 들판에 버렸더니 새들이 모여 날개로 덮어 주었으며 알을 깨뜨리려 하였지만 깨어지지 않아 드디어 유화부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에 알을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 사내아이의 골격과 생김새는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이미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므로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왕자가 있었는데, 큰아들 대소(帶素)가 “후환이 두려우니 제거함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하니 왕이 살찐 말을 골라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마침 왕자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꾀하자, 유화부인이 “멀리 도망가서 큰일을 도모하라.”고 일렀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 마리(摩離) · 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벗삼아 엄체수(淹滯水, 또는 蓋斯水, 掩호水, 奄利大水)에 이르렀다. 이 때 주몽이 강물에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라. 오늘 나를 뒤쫓는 군사가 닥치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이 건너자 곧 흩어져 뒤쫓는 군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한편, 어머니 유화부인이 비둘기 한 쌍을 보내어 보리씨를 전해 주었다. 그리고 모둔곡(毛屯谷: 지금의 渾河流域)에서 재사(再思) · 무골(武骨) · 수거(獸居) 등 세 사람의 신하를 얻었다. 졸본(卒本: 일설에는 紇升骨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기원전 37년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하였다. 왕위에 올라 기원전 36년(동명성왕 2)에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았다.

기원전 33년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고,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또한, 기원전 24년 유화부인이 죽자 동부여의 금와왕이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19년 동부여에서 첫 부인 예씨(禮氏)와 왕자 유리(類利: 뒤에 유리명왕)가 도망해 오므로 태자로 삼았다. 그 해 9월에 왕이 돌아가니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졸본으로 온 뒤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몽설화는, 첫째 여자를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어 태기가 생기고, 둘째 알을 낳고, 셋째 태어난 땅에서 달아나, 넷째 물고기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해, 다섯째 새로운 땅에서 왕이 되었다는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첫째는 단군과 마찬가지로 주몽이 천손(天孫)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 유화부인이 단군의 어머니인 곰이 굴 속에 갇혔던 것처럼 방 속에 갇혔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몽설화 또는 동명설화에는 단군의 전통에서 볼 수 없었던 네 번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가 하백의 외손으로 물의 신령의 영험스러운 능력을 지녔다는 것으로 비를 다스리는 주술적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즉 단군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새로운 농경사회의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朝鮮金石總覽』 上(1919)
『위략(魏略)』
『후한서(後漢書)』
『양서(梁書)』
『위서(魏書)』
『주서(周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수서(隋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천관우, 정음문화사, 1982)
「고구려의 흥기 1」(이홍직, 『국사상의 제문제』, 1959)
「동명왕편에 보이는 신모의 성격에 대하여」(김철준, 『유홍렬박사화갑기념논총』, 1971)
「고구려 유리왕고」(김용선, 『역사학보』 87, 1980)
「동명형설화와 고대사회」(정경희, 『역사학보』 98, 1983)
집필자
정경희(한국일보사,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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