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루 묘지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 하양어두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관리 모두루의 묘지이다. 이 묘에서 주목할 것은 전실 벽에서 발견된 묘지명이다. 묘지명은 현재 250여 자만 판독가능하다. 내용은 모두루의 조상의 이야기와 그의 생애에 대한 것으로 모두루의 조상은 북부여 출신이고 활동 시기는 광개토왕 때임을 알 수 있다. 특징적인 점은 광개토왕릉비의 내용과 표현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묘지명을 통해 4∼5세기 고구려 왕권의 실상과 고구려의 지방 지배 방식, 당시의 씨족 계승 의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1935년 10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의 동북, 즉 북한 자강도 만포의 맞은편 언덕인 하양어두(下羊魚頭)에서 발견되었다. 하양어두의 북방 산록에는 조그만 토분 10여 기가 산재해 있는데, 모두루묘는 이 중의 하나이다.
이 토분은 돌을 쌓아 방을 꾸미고 흙으로 봉분을 입힌 돌방흙무덤(封土石室墓)으로 주실(主室)과 전실(前室)의 2개 석실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둘레 70m, 높이 4m로 중간 정도이다. 그 연도(羨道)는 정서쪽으로부터 남쪽으로 13°기울어진 방향으로 통로가 나 있다. 주실은 가로, 세로 약 3m의 정방형이며, 좌우의 양벽에 접해 관대(棺臺)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어 이 무덤이 본래 두 사람을 매장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실은 가로 3m, 세로 2m 정도의 장방형(長方形)인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실 정면의 윗벽에 한자로 쓰인 묵서(墨書)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이 묘의 주인공인 모두루의 묘지명이다.
이 묘지는 묵서로서 가로와 세로 선을 그었는데, 세로가 10자씩이고 가로가 약 80행으로 모두 800여 자에 달한다. 그러나 최초의 2행은 제기(題記)로서 종횡의 선을 긋지 않았다. 필치는 거칠고 엉성한 편인데, 크기는 세로가 1촌 내지 1촌 2분이고, 가로가 9분 정도이다. 명문은 벽면, 즉 전실 정면의 오른쪽 모서리에서 1척 2촌 정도 띄우고 시작하여 왼쪽 모서리를 거쳐 다시 왼쪽 벽면의 우단(右端)에까지 이어져 있다.
원래 묘지의 명문은 약 800자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부분이 심하게 지워져 현재는 약 250여 자만이 판독 가능한 형편이다. 내용은 크게 5문단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제1행과 2행으로 모두루묘지의 제기이며, 두 번째 부분은 제3∼10행으로 모두루의 선조의 사적, 즉 추모성왕(鄒牟聖王 : 동명성왕)의 노객(奴客)인 모두루의 선조가 북부여로부터 왕을 따라 남하해 왔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제10행에서 제40행까지 30행에 걸쳐 4세기 초에 활약한 것으로 추정되는 모두루의 조상인 대형(大兄) 염모(冉牟)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염모가 특히 북부여의 방위 임무에 큰 실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부분은 제40∼44행으로 모두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관한 기록이다. 그들의 이름은 지워져서 알 수 없지만 관등은 대형이었고, 북방의 성민(城民)과 곡민(谷民)을 지배했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은 제44행 이후로 묘주(墓主)인 모두루의 행적을 기술하고 있다.
묘지명에 의하면 모두루는 광개토왕 시대에 조상의 공에 인연하여 왕의 은혜를 받아 동명성왕과 모두루 일족의 출신지인 북부여의 수사로 파견되었는데, 그 뒤 임지에서 광개토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멀리서 비통해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모두루묘지는 북부여 출신의 전승을 가진 한 씨족의 일종의 씨족사(氏族史)라고 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이 묘지명이 쓰여진 시기는 광개토왕 이후 즉 장수왕대에 해당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덤은 피장자가 염모인지 모두루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특히 묘지 전반부에는 모두루 조상의 이야기, 후반부에는 모두루의 생애가 기술되어 있는데, 이 형식은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서 건국 설화와 유리왕(瑠璃王)과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사적을 기술한 다음 광개토왕의 훈적을 서술한 것과 동일하다. 또한 그 내용과 표현도 유사한 부분이 많아 특기할 만하다.
제기 다음의 3 · 9행은 모두루 집안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인데, ‘ 하백(河泊)의 손자이고 일월(日月)의 아들이신 추모성왕은 본래 북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하여 가문전승에 앞서 건국설화를 가장 먼저 기술하였다. 이는 「광개토왕릉비」의 ‘천제지자(天帝之子)’라는 표현이 ‘일월지자(日月之子)’로, ‘모하백여랑(母河伯女郞)’은 ‘하백지손(河伯之孫)’으로 약간 바뀌었을 뿐, 천제(일월)나 하백과의 관계는 동일하다. 435년 고구려를 방문하였던 북위 사신 이오(李傲)의 견문을 바탕으로 기술한 『위서(魏書)』 고구려전의 ‘일자(日子)’, ‘하백외손(河伯外孫)’이라는 표현과도 상통한다.
이처럼 모두루묘지는 왕실의 건국설화에서 시작하여,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이 나라의 가장 성스러움을 알고 있을지니’라고 하여 고구려 국가의 성스러움을 기술하고 있다. 이것 역시 ‘은택이 황천(皇天)을 윤택하게 하였고, 위엄이 사해(四海)에 떨쳐 골고루 미쳤다’라는 「광개토왕릉비」의 구절과 유사하다. 그 다음에 모두루 집안이 북부여에서 추모성왕을 따라왔다는 집안 내력을 간략히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의 출자를 북부여로 하는 전승과 ‘북도(北道)의 성민과 곡민’이란 문구나 ‘령북부여수사(令北扶餘守事)’라는 관직명을 통해 고구려의 지방지배 방식에 대한 모습 및 4세기경의 모용선비와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모두루묘지는 광개토왕릉비와 함께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의 하나이다. 이 묘지명을 통하여 4∼5세기 고구려 왕권의 실상과 고구려의 지방 지배 방식, 그리고 당시의 씨족 계승 의식 등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