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객은 고구려 왕이 백제나 신라 왕을 칭하거나 고구려 신하가 왕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부른 호칭이다. 「광개토왕비문」, 「모두루묘지」, 「충주고구려비」에 나온다. 광개토왕비문과 충주고구려비에 나온 노객은 백제 왕과 신라 왕을 뜻한다. 모두루묘지에 나온 노객은 고구려의 관료인 모두루가 왕에 대해 자신을 낮춰 표현한 것이다. 노객은 본래 속민이나 노예를 뜻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신하라는 의미로 쓰였다. 고구려가 주변국에 비해 우월하다는 의식 곧, 고구려적 천하관에 따라 사용된 것이다.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왕이 영락(永樂) 6년(396)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 아신왕(阿莘王)이 굴복해 남녀 생구(生口) 1,000인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면서 “지금 이후 영원토록 노객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從今以後 永爲奴客)”고 한다. 이에 ‘태왕(太王: 광개토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써 용서하였다. 또한 영락 9년(397) 신라 내물마립간(奈物麻立干)이 사신을 보내어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을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부해 청명합니다(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라고 하였다. 이에 ‘태왕’이 은혜와 자비로써 계책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위 구절 중 ‘以奴客爲民’에 대해서는 신라왕인 노객이 고구려왕의 민이 되었다고 풀이하는 설과, 이전부터 고구려왕의 노객이었던 백제왕을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한다고 풀이하는 설, 신라왕인 노객을 왜군이 자신의 민으로 삼으려 한다고 풀이하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내용상 신라가 급박한 상황을 고구려에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므로, 왜가 고구려왕의 노객인 신라왕을 왜의 민으로 만들려 했다고 풀이하는 것이 온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노객은 신라왕을 가리키는 것이며 노객은 고구려의 ‘태왕’의 은혜와 자비를 입은 신하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태왕-은혜-노객(백제와 신라의 왕)이라는 관념은 그 무렵 대두한 고구려를 중심의 천하관(天下觀)에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충주고구려비」에는 고구려 태왕[장수왕(長壽王)]이 교를 내려 신라 매금(寐錦)에게 의복을 하사하여 노객인의 관계를 맺었다고 나온다. 노객을 태왕과 속민(屬民)의 중간에서 태왕의 신료로서의 기능을 갖는 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모두루묘지」에는 그 묘의 주인공인 모두루가 ‘노객모두루(奴客牟頭婁)’(46행), ‘노노객(老奴客)’(57행)으로 표현된다. 이는 모두루가 광개토왕에 대해서 자신을 낮추어 표현할 때에 사용된 것이다. 그는 대사자(大使者)의 관등을 갖고 있었으며, 광개토왕 때에는 영북부여수사(令北夫餘守事)라는 지방관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여기의 노객은 고구려왕의 신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묘지에 따르면, 모두루의 조상은 ‘성왕(聖王)’ 곧 고주몽(高朱蒙)을 따라 북부여(北夫餘)로부터 남하한 이래 대대로 ‘관은(官恩)’을 입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할아버지인 대형(大兄) 염모(冉牟)가 죽은 뒤 그 집안의 대형 ‘慈□’와 대형 ‘□□’ 등이 ‘관은’으로 지방관이 되었으며, 모두루도 ‘성왕’ 곧 광개토왕의 ‘은교(恩敎)’로써 지방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노객은 ‘성왕’의 ‘관은’을 전제로 한 표현인 것을 알 수 있으며, 비문에 나오는 ‘태왕’의 은혜에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성왕-관은-노객(모두루)이라는 관념은 광개토왕 대를 전후한 왕권의 강화를 바탕으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노객이라는 용어는 백제, 신라인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태왕이 백제신라왕을 비칭하여 사용했거나, 혹은 고구려 신하가 고구려 태왕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부른 호칭이다. 그러므로 노객이라는 용어 안에는 고구려가 주변국에 비해 우월하다는 의식, 곧 고구려적 천하관이 용해되어 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