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삼국의 하나로서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으며 660년에 멸망한 고대국가이다. 서기전 18년에 부여족 계통인 온조 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한인·예인 등의 토착민을 부여족이 지배하는 형식이었다. 건국 후 고구려·신라와 동맹과 공방을 되풀이하면서 영역을 영산강·섬진강 유역까지 확장하여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백제화하고, 다시 왜나 가야에 전수해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에 의해 멸망했다.
백제(百濟)는 서기전 18년에 부여족(扶餘族) 계통인 온조(溫祚)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4세기 중반에는 북으로 황해도에서부터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 일대를 영역으로 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660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3년 간 치열한 부흥운동(復興運動)을 전개하였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678년 동안 존속한 백제 역사의 전개과정을 수도 변천을 중심으로 보면 한성도읍기(漢城都邑期: 기원전 18∼기원후 475), 웅진도읍기(熊津都邑期: 475∼538), 사비도읍기(泗沘都邑期: 538∼660)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백제를 구성한 주민들의 계통을 보면 선주토착민은 한인(韓人)이었고, 여기에 예인(濊人)들이 섞였다. 한성도읍기에 지배층은 부여족 계통이 주류를 이루었다. 4세기 이후 삼국 간의 접촉과 중국 및 왜(倭)와의 접촉이 본격화되면서 신라인 · 고구려인 · 왜인 · 중국계통의 사람들도 지배세력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세 차례 천도를 하면서 개성있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한성시대에는 서울시 석촌동에 있는 대규모의 적석총(積石塚)에서 보듯이 고구려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웅진 및 사비로 천도하면서 중국의 남조문화(南朝文化)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또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하고, 다시 왜나 가야(加耶)에 전수해 고대 동아시아 공유(共有)문화권을 형성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집단이 고구려에서 남하해 내려와 한강 유역의 위례성(慰禮城)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 과정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기본사료인 『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의 초기 기록과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의 내용이 상충하는 점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영역과 관련하여 『삼국지』 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 무렵까지 경기 · 충청 · 전라도 지역에 마한(馬韓) 54국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백제는 그 중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으로 나온다. 반면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서기전 1세기 초에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전라북도 고부(古阜)까지 영역으로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배체제와 관련하여 동이전에는 국의 지배자인 국읍(國邑) 주수(主帥)가 읍락(邑落)의 거수(渠帥)들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에 백제본기에서는 3세기 중엽 경에 이미 6 좌평(佐平) · 16관등제(官等制)라고 하는 잘 짜여진 국가조직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두 사서가 보여주는 백제의 모습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어느 자료를 택하느냐에 따라 백제의 건국 ·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초기기록을 신뢰하는 입장과 동이전의 내용을 강조하는 입장 등이 나왔다. 여기서는 3세기까지 백제국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이었다는 동이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고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에 보이는 영역 확대 기사는 후대의 것이 부회(附會)된 것으로 보는 절충론(折衷論)의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두 가지의 건국설화(建國說話)가 실려 있다. 온조 중심의 설화에 의하면 온조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朱蒙)과 졸본왕녀(卒本王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瑠璃)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가 되자, 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해 위례(慰禮)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고,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통합했다고 한다.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비류는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우태가 죽은 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해오자 소서노는 주몽에게 개가(改嫁)해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는 어머니를 모시고 무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미추홀(彌鄒忽)에 정착했다고 한다.
건국설화에 의할 때 백제를 건국한 주체집단은 부여족 계통의 유민인 것은 분명하다. 온조집단은 처음에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후 십제는 미추홀(현 인천광역시 일대)의 비류계 세력과 연맹을 형성했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라고 하는 시조 형제설화(兄弟說話)는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형제설화에서 비류가 형으로 나오는 것은 연맹 초기에 비류계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든 무리들이 온조에게 귀부했다는 것은 그 후 어느 시기에 온조계가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시기는 초고왕(肖古王)이다. 초고왕은 정치의 중심지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옮기고 국호를 ‘백제’로 개칭하였다. 이후 백제의 왕계는 온조계의 부여씨(扶餘氏)로 고정되었다.
백제의 성장에는 청동기시대 이래 발달한 한강유역의 청동기 및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 기반과 이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농업생산력의 증대 및 내륙 지방은 물론 서해안과 잘 통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닌 한강의 지정학적인 조건 등이 작용하였다. 이후 백제의 성장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연맹 내의 세력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지배력 강화는 우보(右輔) · 좌보(左輔)와 같은 직에 지역 세력들을 임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다른 하나는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면서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외부 세력은 백제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중국 군현(郡縣)과 약탈적인 침략을 해오는 말갈(靺鞨)로 표현되는 예(濊)세력이었다. 백제는 이들과 공방을 치루면서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에서는 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246년에 진한(辰韓)의 8국을 분할하는 문제로 마한과 낙랑 · 대방군(樂浪 · 帶方郡)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서 마한은 대방태수(帶方太守)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패배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목지국(目支國)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백제는 목지국을 제압하고 새로이 마한의 맹주국이 되었다. 그 시기가 고이왕(古爾王)대이다. 고이왕은 주변 세력들을 아울러 북으로는 예성강(禮成江), 동으로는 춘천(春川), 남으로는 안성(安城) · 성환(成歡), 서로는 서해에 이르는 지역을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좌장(左將)을 설치해 병마권(兵馬權)을 장악하고, 좌평을 설치하여 귀족회의를 주관하게 함으로써 왕의 위치를 한 단계 격상시켰으며, 금령(禁令)을 선포하고 솔계(率系) 관등과 덕계(德系) 관등을 토대로 하는 관제를 만들어 지배체제의 확립을 도모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고대국가로서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3세기말 4세기 초에 중국의 서진(西晉)은 ‘8왕의 난(291∼306)’이라고 하는 왕족들 사이의 반란과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오호(五胡)]의 침입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로 말미암아 한반도에 위치한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이에 백제는 낙랑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였지만 책계왕(責稽王)과 분서왕(汾西王)이 낙랑 세력에 의해 피살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책계왕과 분서왕의 피살을 계기로 초고왕계인 비류왕(比流王)이 왕위에 올랐다.
비류왕은 김제에 대규모의 벽골제(碧骨堤)를 축조하는 등 수리시설을 확충시켜 농업경제력의 기반을 확대하였고, 활쏘기 연습을 장려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서제 우복(優福: 扶餘優福)의 반란을 평정한 후에는 진씨(眞氏) 세력과 결합해 정치적 기반도 안정시켰다. 이 토대 위에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즉위하여 초고왕계(肖古王系)의 왕위계승권을 확립하였다. 즉위 후 근초고왕은 진씨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여 아신왕(阿莘王)대까지 진씨 왕비족시대를 열었으며, 귀족세력들의 상하 서열을 분명히 하기 위해 관등제를 일원화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영역을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를 담로제(擔魯制)라 한다. 담로제의 실시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는 직접지배로 바뀌었다. 또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여 왕실의 권위를 신성화시키고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이렇게 다져진 기반 위에서 근초고왕은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 49년(수정연대 369)조에 의하면 왜가 비자벌(比子伐: 경남 창녕) · 남가라(南加羅: 경남 김해) · 안라(安羅: 경남 함안) · 가라(加羅: 경북 고령))등 가야 7국을 평정한 뒤 군대를 돌려 고해진(古奚津: 전남 강진)에 이르고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 新彌國)를 정벌하고 비리(比利) · 벽중(辟中) · 포미지(布彌支) · 반고(伴古) 등 4읍의 항복을 받아 백제에 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왜가 백제에 땅을 주었다는 것은 『일본서기』 편찬자의 왜곡과 윤색이 분명하다. 이 기사의 역사적 실상은 근초고왕이 가야지역으로 진출해 왜와의 교역로를 확보했다는 것과 전라도 지역에 잔존하고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정복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근초고왕대에 백제는 남으로 영산강(榮山江) 유역까지를 영역으로 편입했던 것이다. 영산강 유역을 장악한 근초고왕은 남진해 내려오는 고구려세력과 대결하였다. 특히 371년(근초고왕 26)의 평양성전투(平壤城戰鬪)에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어 수곡성(水谷城: 황해도 신계)까지 영역으로 하였다.
백제 초기의 대중관계(對中關係)는 낙랑 · 대방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근초고왕이 동진(東晋)에 사신을 파견하고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의 작호(爵號)를 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조공(朝貢)은 한반도 내에서의 역학관계를 중국과 연결함으로써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던 외교행위였다. 백제의 중국에 대한 외교는 지리관계상 주로 남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때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북조(北朝)와의 교섭도 추구하였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는 『삼국사기』에는 우호적이고 상호 원조하는 형태로 나온다. 이는 일본열도로 이주한 백제계 사람들이 왜정권(倭政權)의 핵심에 자리한 것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는 근초고왕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양국관계는 칠지도(七支刀)에 새져진 금상감명문에서 엿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백제는 왜왕을 후왕(侯王)으로 대우하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백제는 왜에 학술 · 기술 등 선진문물을 제공하였고, 그 대신 왜는 백제에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 백제가 왜에 박사 왕인(王仁)을 파견하여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보내준 것은 전자의 사례가 되며,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왜군이 백제를 도와 고구려. 신라군과 싸운 것은 후자의 예가 된다.
침류왕(枕流王)대에 와서 백제는 동진으로부터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를 예로써 맞이하면서 불교를 공인하였다. 불교 공인을 통해 백제는 확대된 영토와 강화된 왕권을 지지하는 고대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확립해 보편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침류왕이 죽은 뒤, 동생 진사(辰斯)는 조카 아신(阿莘)의 왕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7년 뒤 아신은 숙부 진사왕(辰斯王)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왕족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의 배후에는 왕비족으로서의 진씨 세력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진씨 세력은 군권(軍權)을 장악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와의 공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와서 고구려 광개토왕은 적극적인 정복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신라를 자국 편으로 끌어들인 뒤 백제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58성(城) 700촌(村)을 점령당하고,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명을 인질로 보내야 하는 궁지에 몰렸다. 한반도에서의 세력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아신왕은 태자 전지(腆支)를 왜에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다. 또 고구려에게 빼앗긴 북방의 요충지인 관미성(關彌城)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일으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신왕이 죽은 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지배세력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태자 전지를 지지한 해씨(解氏) 세력이 왕제 혈례(碟禮)를 지지한 진씨 세력을 누르고 전지왕(腆支王)을 옹립하였다. 해씨세력은 진씨를 대신하여 왕비를 배출하였다. 이로써 실권(實權)세력은 진씨에서 해씨로 교체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해씨 세력은 상좌평(上佐平)을 설치하여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게 하는 등 실권귀족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해나갔다. 실권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은 구이신왕(久爾辛王)대와 비유왕(毗有王)대에도 지속되었다. 이로써 왕권은 매우 미약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왕이 정복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평양천도를 추진하였다. 이 기간 동안 장수왕은 대외 정복활동을 자제하였지만 427년에 천도를 단행한 후 남진을 재개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와 신라에 큰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는 신라에 우호관계를 요청하여 비유왕 7년(433)에 동맹이 맺어졌다. 이 동맹은 백제가 주도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라동맹(濟羅同盟)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동맹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해 공동으로 방어하는 공수동맹(共守同盟)의 성격의 것이었다. 나아가 비유왕은 송(宋)에 사신을 보내 역림, 식점과 더불어 요노(腰弩)를 요청하여 받았다. 요노라고 하는 신무기의 도입으로 백제 무기체계를 새롭게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유왕은 흑룡(黑龍)이 사라진 후 죽었다는 기사와 무덤도 제대로 조영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상징해 주듯이 비명에 사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개로왕(蓋鹵王)은 후반에 와서 실권귀족중심체제를 극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개로왕은 궁실을 장려하게 하고, 부왕의 능을 개수했으며,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등 일련의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전제화정책(王權專制化政策)은 안으로는 귀족들의 반발에 부닥쳤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국가 재정을 탕진하게 하였고 밖으로는 북위가 군사원조를 거부함으로써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475년에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장수왕이 친히 거느린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왕도(王都)는 함락되고, 개로왕은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다. 이로써 백제는 웅진천도(熊津遷都)라고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기 직전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 문주(文周)는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개로왕은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된 뒤였다. 이에 문주는 목협만치(木劦滿致) · 조미걸취(祖彌桀取)의 보필을 받아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웅진으로 천도를 하게 된 데는 웅진 지역에 기반을 둔 백씨(白氏)세력의 도움이 컸다. 금동관, 금동신발, 장식대도, 중국제 청자가 다수 출토된 공주수촌리고분군은 백씨 세력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천도 후 문주왕(文周王)은 왜에서 귀국한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고, 장자 삼근(三斤)을 태자로 책봉해 왕실의 안정을 꾀하면서 국가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들은 자체분열을 일으키고 있었고,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감으로써 대중국 접촉도 방해를 받게 되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병권을 장악한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는 문주왕을 살해하고, 어린 삼근왕(三斤王)을 세워 전권을 휘두르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해구의 반란은 덕솔(德率) 진로(眞老)에 의해 평정되었고 삼근왕도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이에 진로는 왜에 있던 동성(東城)을 옹립하였다.
동성왕(東城王)은 비록 옹립되었지만 즉위 후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어려운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라 왕족인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신라와의 동맹체제를 보다 돈독히 하면서 사씨(沙氏) · 연씨(燕氏) · 백씨(苩氏) 등 신진 지방세력들을 중앙에 등용해 한성에서 내려온 기존 세력과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남제(南齊)와의 교통을 재개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북위에 대해서는 위로(魏虜), 흉리(匈利)로 폄하하는 등 대립각을 세웠다.
동성왕은 19년(497)에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신진세력의 하나인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이는 동성왕이 신진세력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진세력의 위세가 커지자 이를 억제하기 위해 동성왕은 측근 중심의 정치운영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를 가림성(加林城)의 성주(城主)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만을 품은 백가는 도리어 자객을 보내 왕을 살해하였다.
동성왕을 이어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하였다. 무령왕은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무령왕릉지석(武寧王陵誌石)」과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百濟新撰)』을 종합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모형이 된다. 즉위 후 무령왕은 먼저 백가의 난을 평정해 왕권을 안정시켰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선제공격을 단행하는 등 공세적 입장을 취하여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유식자(遊食者)들을 귀농(歸農)시켜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을 적극 개발해서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다. 또 지방통치조직인 담로에 자제종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하였다. 나아가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남원 · 하동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한성을 상실한 이후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토대 위에서 무령왕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하였고 양(梁)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아 국제관계상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호화롭고 풍부한 부장품들은 무령왕대의 왕권의 신장과 국력의 성세를 보여주는 물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웅진 지역의 지리적 조건은 방어하기에 좋은 요충지이나 한 나라의 수도로서는 협소하였다. 이에 성왕(聖王)은 무령왕대에 이루어진 안정 기반을 바탕으로 백제의 중흥과 왕권강화를 이루기 위해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비 지역은 금강이 감돌아 방어에 유리하고 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유리한 곳이었다. 사비로의 천도는 성왕의 영민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과 성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사비천도를 적극 지지한 세력으로는 사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신진세력인 사씨 세력과 한성에서 남하해 온 목씨(木氏) 세력 등이었다. 성왕은 사비에 왕궁을 비롯해 여러 관청을 건축하고, 부소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되는 나성(羅城)을 축조하고 시가지는 방리제(方里制)에 입각해 정비한 후 538년(성왕 16)에 천도하였다.
천도 후 성왕은 왕권강화를 위한 제반 조처를 추진해나갔다. 우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여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전통성과 권위를 강화하였다.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모시박사(毛詩博士) · 강례박사(講禮博士) 등을 초빙하여 문화의 질을 높이고, 선진문물을 왜에 전수하였다. 그리고 중인도(中印度)로부터 오부율(五部律)을 갖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 백제적 계율종(戒律宗)을 설립시키고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중앙통치조직으로 좌평을 1품으로 하고 극우(剋虞)를 16품으로 하는 16관등제를 정비하고, 22부사제(部司制) 등 중앙의 중요 관청들을 설치하였다. 수도의 행정 조직은 5부(五部)로 나누고 각 부 아래에 5항(五巷)을 두는 5부-5항제로 완비하였고, 지방은 전국으로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郡)과 성[城: 현(縣)]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편제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렇게 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22부가 정치운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귀족들의 회의체인 5좌평제는 그 위상이 약화되었다.
천도를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한강 유역 회복작전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자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신라 · 가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서북으로부터 돌궐(突厥)의 남하에 따른 압력을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외척들이 싸움을 벌이는 등 내분에 처해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신라 · 가야군과 연합한 백제군은 551년에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마침내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한강 상류의 점령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히 고구려와 결탁한 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았다. 신라의 이러한 돌발 행동으로 양국 사이의 화호(和好)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원로 대신인 기로(耆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자 여창(餘昌: 扶餘昌)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정벌에서 백제군은 초기에는 우세를 보였으나 마침내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성왕은 신라 복병에 의해 사로잡혀 전사함으로써 대패하였다. 이 패배로 백제는 왕을 비롯해 좌평 4명이 전사하고, 사졸(士卒) 3만여 명이 전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선에 나가 있던 왕자 여창도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
관산성전투 패전은 백제의 정국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신라정벌을 반대하였던 기로들은 위덕왕(威德王)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정치적 발언권을 증대해나갔다. 이로써 사씨 · 연씨 · 해씨 · 진씨 등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표현되는 가문들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실권귀족들은 좌평의 정원을 5명에서 6명으로 확대하여 6좌평회의체(六佐平會議體)를 최고 귀족회의체로 만든 후 정치운영을 주도해나갔다.
그러나 위덕왕은 10년(567)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사(陵寺)를 창건하고 여기에 사용할 도구의 하나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를 만들었다. 금동대향로는 성왕이 추구한 유교 · 불교 · 도교 삼교(三敎)의 공존과 상보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20년(577)에는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 이는 위덕왕이 초기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점차 왕권강화를 추구한 것을 보여준다. 법왕(法王)은 위덕왕대에 지어진 왕흥사를 국가적 차원의 사찰로 그 격을 높여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실권귀족들의 반대로 재위 2년의 단명으로 죽었다. 이에 실권귀족들은 익산(益山)에서 마[薯]를 캐며 살던 몰락한 왕족 출신인 무왕(武王: 扶餘璋)을 옹립해 왕으로 삼았다. 무왕의 출자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오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지룡(池龍)의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서동(薯童)으로서 가난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보면 그는 몰락왕족 출신이라 할 수 있다.
무왕은 귀족들의 정략적 옹립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즉위 후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일련의 조처를 추진하였다. 먼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하였다.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결혼에 대해 당시에 백제와 신라는 빈번히 전쟁을 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 결혼이 매우 설화적이라고 꼬집는 견해가 있다. 또 근래에 미륵사지서탑(彌勒寺址西塔)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에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나온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하여 선화공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왕실과 왕실 사이의 결혼은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될 때 이루어진다는 점, 고대사회에서는 왕비가 동시에 2명 이상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시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혼 시기는 신라 진평왕이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달라고 요청한 청군표(請軍表)를 쓴 608년 전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무왕은 익산을 경영하여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은 후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무왕은 제석사(帝釋寺)를 만들고, 거대한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다.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무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겨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그의 익산천도 계획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로써 신도(新都) 경영을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이라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무왕은 재위 33년(632)에 왕자 의자(義慈)를 태자로 삼았지만 익산으로의 천도가 좌절된 이후 점차 환락에 빠졌다. 이를 기회로 측근들이 권세를 농단하기 시작하여 정치정세는 매우 어지러워졌다. 무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의자왕(義慈王)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유교이념에 투철하였지만 친위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즉위에 반대하였던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유력 귀족 40여 명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미후성을 친히 공격하면서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한 의자왕은 대외적으로 고구려 · 왜와 화친관계를 수립하고 신라에 대해서는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하는 등 압박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15년 이후에 궁정의 측근세력들에게 둘러싸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왕의 총애를 받았던 왕비 은고(恩古) 세력의 작동과 의자왕의 병환이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의자왕은 왕의 행동을 비판한 성충(成忠)을 투옥하여 죽이고 말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지배계층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의자왕의 탐락과 황음(荒淫) 및 그에 따른 궁중 내부에서의 부패와 정권의 천단은 백제의 지배질서를 더욱 문란하게 하였다. 또한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가중하였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패배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이런 빈번한 전쟁은 국력을 피폐시키고 농민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백제의 군사적 압박은 신라로 하여금 당나라와의 결합을 가속화시켰고, 그 결과 신라 김춘추(金春秋)는 당나라에 들어가 당태종(太宗)과 나당군사동맹(羅唐軍事同盟)을 맺었다. 나당연합군의 결성은 백제를 더욱 더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은 고구려 공격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던 종래의 전략과는 달리 먼저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660년 6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와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은 백제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백제 군신들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한 신라군은 요충지인 탄현(炭峴)을 무사히 통과하였고, 당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기벌포(伎伐浦)에 상륙하였다. 화급해진 의자왕은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출전하게 하였다. 비장한 각오로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린 계백은 황산벌전투(黃山伐戰鬪)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채 전사하였고, 백강(白江) 하구에 상륙한 당군은 신라군과 합세하여 사비성(泗沘城)으로 진군하였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태자와 더불어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을 갔다. 이에 왕자 태(泰: 扶餘泰)가 사비성을 지키면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민심이 동요하고 이탈자가 많이 생겨나자 당군에 항복하였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을 지키던 방령(方領) 예식(禰植)이 의자왕을 겁박하여 당군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사비성을 점령한 나당연합군은 횡포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점령군의 이러한 횡포는 백제 유민들을 크게 자극하여 곧바로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끊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흥사계절(興祀繼絶)’의 정신을 표방하였다. 백제부흥군의 중심 인물로는 정무(正武) · 지수신(遲受信) · 흑치상지(黑齒常之) · 복신(福信) · 도침(道琛) 등을 들 수 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승려 도침과 더불어 임존성(任存城)을 공격해 온 소정방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는 부흥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그에 따라 각 지역의 200여 성들이 부흥군에 호응함으로써 부흥군의 형세는 커졌다.
661년 3월 도침이 거느린 군대는 웅진강(熊津江) 전투에서 당군에 패배하였지만 복신의 군대는 1달 여 동안 지속된 두량윤성(豆良尹城) 전투에서 신라 대군을 격파하여 신라군의 기세를 꺾었다. 이후 복신과 도침은 중심지를 임존성에서 주류성(周留城: 전북 부안의 위금안산성)으로 옮긴 후 661년 9월에 의자왕의 아들 풍(豊: 扶餘豊)이 왜에서 귀국하자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부흥백제국이 성립되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후 도침은 ‘영군장군(領軍將軍)’을,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을 칭하면서 신라가 사비성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나당연합군의 지배지역은 극히 제한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복신과 도침 사이에 불화가 생겨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였다. 부흥군 지휘부 내의 내분과 암투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도록 하여 내사지성(內斯只城)들과 거열성(居列城) 등 남방 지역의 거점 성들이 신라에 함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신은 풍왕(豊王)을 암살하려다가 도리어 풍왕에게 살해당하였다. 이 틈을 타서 나당연합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에 풍왕은 고구려와 왜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이 요청에 응해 왜는 2만 7천명의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풍왕은 왜의 수군과 연계하여 백강과 주류성에서 나당연합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백강구전투(白江口戰鬪)에서 왜군은 당나라 수군과 4번 싸워 크게 패배했고 황급해진 풍왕은 고구려로 도망을 쳤다. 곧이어 주류성도 신라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때 지수신은 임존성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에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고구려로 망명하여 임존성마저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3년간에 걸친 백제부흥군의 부흥전쟁 · 부흥운동은 끝을 맺고 말았다.
백제의 정치제도는 국가발전 단계에 따라 변하였다. 국(國)단계에는 국읍의 주수와 읍락의 거수가 정치의 중심을 이루었다. 연맹단계에 와서 우보와 좌보가 설치되어 군국정사를 관장하였다. 고이왕대에 5부체제가 이루어지면서 각국의 수장들은 중앙귀족으로 전화되었다. 그러나 국왕이 부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배조직은 국왕 직속의 관직과 각 부의 장에게 직속된 관직이 양립하는 이원적인 체제로 운영되었다. 근초고왕대에 와서 백제는 이원적인 지배조직을 일원화하고 지방통치조직을 만들어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이 시기 통치조직의 핵심은 관등제, 관직제, 작호제(爵號制), 귀족회의체, 군사조직, 지방통치조직, 신분제 등이다. 이러한 제도는 한성도읍기에 기본틀이 만들어졌고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시대에 와서 정비되었다.
관등은 중앙귀족과 지방세력들을 서열화하여 상호간의 상하를 구별짓는 제도이다. 국단계에서는 관등과 관직의 구별이 없었다. 그러나 고이왕대에 와서 중앙귀족화한 세력들을 지배체제 내로 편제하기 위해 좌평과 솔계(率系) 관등, 덕계(德系) 관등이 만들어졌다.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근초고왕 대에는 좌평을 최고위로 하고 그 아래에 솔계 관등과 덕계 관등을 각각 다섯으로 분화시키고 맨 아래에 좌군(佐軍)- 진무(振武)-극우를 두어 관등제를 일원화하였다. 전지왕대에 상좌평이 설치되면서 좌평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이 관등제는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16관등제로 정비되었다. 16관등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품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
관등명 | 좌평 佐平 |
달솔 達率 |
은솔 恩率 |
덕솔 德率 |
한솔 扞率 |
나솔 奈率 |
장덕 將德 |
시덕 施德 |
고덕 固德 |
계덕 季德 |
대덕 對德 |
문독 文督 |
무독 武督 |
좌군 佐軍 |
진무 振武 |
극우 剋虞 |
〈표 1〉 백제 16관등의 명칭 |
16관등제에서 좌평은 1품이었고, 좌평은 처음에는 5명이었으나 뒤에 6명이 되었다. 달솔은 2품이었고 정원은 30명이었다. 3품 은솔 이하는 정원이 없었다. 정원이 정해진 좌평과 달솔은 가장 핵심적인 관료집단이 가질 수 있는 관등이었다. 문독과 무독은 문 · 무의 구별이 관등제에 반영된 것을 보여준다.
16관등은 복색과 관식(冠飾) 및 띠의 색〔帶色〕에 의해 구분되었다. 1품 좌평에서 6품 나솔까지는 자복(紫服)을, 7품 장덕 이하 11품 대덕에 이르는 관등은 비복(緋服)을, 12품 문독 이하 16품 극우까지는 청복(靑服)을 입었다. 대색(帶色)의 경우 장덕까지는 자대(紫帶), 시덕은 조대(皂帶), 고덕은 적대(赤帶), 계덕은 청대(淸帶), 대덕 · 문독은 황대(黃帶), 무독 이하 극우까지는 백대(白帶)를 띠었다. 관제(冠制)의 경우 왕은 금화(金花)로, 나솔 이상은 은화(銀花)로 관을 장식하였다.
연맹단계에서 정치는 좌보와 우보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아직까지 관직과 관등은 미분화한 상태였다. 부체제 단계에 와서 좌장이 설치되면서 관직과 관등은 분화되고 관부도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부과 관직제는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와서 22부-사(二十二部司)로 재정비되었다. 22부의 명칭과 담당 업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 관부명 | 담당 업무 | 구분 | 관부명 | 담당 업무 | ||
---|---|---|---|---|---|---|---|
내관 | 전내부(前內部) | 왕명출납 · 국왕근시 | 외관 | 사군부(司軍部) | 내외병마 | ||
곡부(穀部) | 곡물공선 · 어료지 관리 | 사도부(司徒部) | 교육 · 의례 | ||||
육부(肉部) | 육류공선 · 왕실목장 관리 | 사공부(司空部) | 토목 · 역역 관리 | ||||
내경부(內京部) | 왕실창고 관리 | 사구부(司寇部) | 형벌 · 사법 | ||||
외경부(外京部) | 국용창고 관리 | 점구부(點口部) | 호구파악 | ||||
마부(馬部) | 어마 · 승물 관리 | 객부(客部) | 외교 · 사신접대 | ||||
도부(刀部) | 무기 · 무구 제작 | 외사부(外舍部) | 관료의 인사 | ||||
공덕부(功德部) | 불교사원 | 주부(綢部) | 직물제조 · 공물출납 | ||||
약부(藥部) | 어의 · 제약 | 일관부(日官部) | 천문 · 점술 | ||||
목부(木部) | 토목 · 건축 | 도시부(都市部) | 시장 · 교역 · 왕도의 관리 | ||||
법부(法部) | 의례 및 왕족 관리 | ||||||
후궁부(後宮部) | 후궁 관리 | ||||||
〈표 2〉 백제 22부의 명칭과 담당 업무 |
22부-사제는 상위 관부인 부와 하위 관부인 사(司)로 구성되었다. 부는 궁중사무를 관장하는 내관(內官) 12부와 일반 국무를 관장하는 외관(外官) 10부 등 22부로 이루어졌다. 22부를 보면, 일반 서정(庶政)을 담당하는 부에 궁중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의 수가 많다. 이는 왕권 중심의 관부 운용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군부(司軍部)∼ 사구부(司寇部)까지의 명칭은 중국 고대의 『주례(周禮)』의 6관(六官)의 명칭과 동일하다. 이는 북주(北周)의 주례주의적(周禮主義的) 관제정비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각 부의 장은 장사(長史) · 재관장(宰官長) 등으로 불렸으며 3년에 한 번씩 교체되었다. 이외의 관직으로 박사, 부마도위(駙馬都尉), 막부(幕府) 관료 등을 들 수 있다. 박사는 오경박사(五經博士), 역박사(易博士), 모시박사 등 유교경전을 전문으로 하는 박사와 와박사(瓦博士), 노반박사(露盤博士) 등 전문기술직을 담당한 박사로 구분된다. 부마도위는 왕의 사위를 예우하기 위한 관직이다. 장사, 사마(司馬), 참군(參軍)은 막부에 설치된 관직으로서 주로 외교 및 군사업무를 담당하였다.
작호제는 공을 세운 고위귀족들에게 수여하는 칭호로서 왕 · 후 · 장군호(王 · 侯 · 將軍號)가 사용되었다. 이 작호제는 칠지도에 왜왕을 후왕으로 부른 것에서 보듯이 근초고왕대에 실시되었다. 왕 · 후로는 아착왕(阿錯王), 불사후(弗斯侯) 등에서 보듯이 지명이 붙은 형태로 사용되었고 장군호로는 정로장군(征虜將軍), 관군장군(冠軍將軍), 보국장군(輔國將軍) 등이 사용되었다. 근래에 전북 고창에서 ‘△義將軍之印’이 새겨진 청동도장이 출토되어, ‘△義將軍’이라는 또 하나의 장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초기백제 시기에는 귀족회의가 국가의 군국사무를 총괄하였다. 부체제 단계에 들어온 이후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귀족회의가 수행하던 기능은 점차 행정관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권력이 초월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항은 귀족회의체에서 논의되었다.
귀족회의체의 모태는 국의 거수들로 구성된 족장회의체였다. 이후 부체제가 확립되고 중앙귀족이 생겨나면서 중앙귀족 중심의 회의체가 만들어졌다. 이를 제솔회의(諸率會議)라고 한다. 제솔회의의 의장은 좌평이었고 구성원은 솔계 관등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근초고왕대에 와서 제솔회의는 제신회의(諸臣會議)로 개칭되었다. 전지왕대에 와서 상좌평의 설치로 좌평은 상좌평, 중좌평(中佐平), 하좌평(下佐平) 등 5좌평으로 분화되었다. 이리하여 좌평으로 구성된 회의체가 이제 최고귀족회의체가 되었다.
사비도읍기에 와서 좌평의 정원이 6명으로 늘어나면서 6좌평회의체가 최고귀족회의체가 되었다. 이 가운데 내신좌평은 수석좌평으로서 의장의 기능을 하였다. 6좌평 회의체는 재상을 뽑는 것과 같은 중요한 국사는 신성한 지역에서 처리하였다. 백마강 건너편에 있는 호암사(虎岩寺)의 정사암(政事巖)은 이러한 신성지역의 하나였다. 6좌평의 명칭과 관장 업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칭 | 직무 |
---|---|
내신좌평(內臣佐平) | 왕명 출납 |
내두좌평(內頭佐平) | 재정 업무 |
내법좌평(內法佐平) | 외교와 의례업무 |
위사좌평(衛士佐平) | 형옥관계 업무 |
조정좌평(朝廷佐平) | 왕궁 숙위 업무 |
내병관좌평(兵官佐平) | 내외병마권 관장 |
〈표 3〉 백제 6좌평의 명칭과 직무 |
도성은 왕권의 표상이다. 백제의 최초의 도성은 위례성이다. 위례는 울타리라는 의미인데 백제에서는 도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 위례성은 뒤에 한성으로 불렸다. 한성은 큰 성이라는 의미이다. 한성도읍기의 도성은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이루어진 2성체제였다. 위치에서 볼 때 북성은 풍납토성(風納土城)으로서 평지성(平地城)이며 평소의 거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서 유사시에 대피하는 산성적(山城的) 성격을 지녔다.
풍납토성은 둘레가 3.5㎞에 달하는 평지성으로서 성벽의 저변은 43m가 넘고 높이도 9m 이상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토성이다. 성 내부를 발굴한 결과, 신전(神殿)으로 생각되는 건물지와 이 신전에 사용한 토기들을 보관해둔 우물형 수장고와 중국제 도자기를 보관한 창고도 확인되었다. 이외에 부뚜막이 있는 주거지와 도로 유적 및 무수한 기와 등도 출토되었으며 성밖에서는 목조 우물도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은 구릉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서 성벽에는 목책을 둘렀다. 성내를 발굴한 결과, 저장 시설과 연지가 확인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이곳에 별궁(別宮)이 조영되었다.
웅진도읍기의 도성은 웅진성이었다. 이 웅진성은 오늘날의 공주 공산성(公山城)이다. 왕궁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공산성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연회장소인 임류각(臨流閣)도 확인되었다.
사비도읍기의 도성은 사비성이었다. 사비도성은 나성으로 둘러싸였다. 발굴 결과 북나성(北羅城)과 동나성(東羅城)은 확인되었고 서측과 남측은 백마강을 자연방어 시설로 활용하였다. 왕궁은 부소산성(扶蘇山城)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부소산성은 평화시에 후원의 역할을 하였다. 시가지 구조는 관북리에서 정리사지로 뻗은 남북 대로를 중심으로 사방이 바둑판처럼 짜여졌다. 이를 방리제라고 한다. 도성 내부는 상부(上部) · 전부(前部) · 중부(中部) · 하부(下部) · 후부(後部)로 나뉘고, 각 부는 다시 오항으로 나누어졌다. 궁남지(宮南池)에서 출토된「서부후항 목간」은 왕도 조직이 부-항으로 이루어진 것을 입증해준다.
각 부는 달솔 관등을 소지한 자가 맡았으며, 500명의 군사가 배속되어 있었고, 나성 외곽에는 청마산성(靑馬山城), 주장산성, 울성산성(蔚城山城), 부산성(浮山城), 석성산성(石城山城) 등 많은 성들이 배치되어 도성 방어망을 형성하였다.
백제의 지방제도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지방의 생산물 수취를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부체제 단계까지 지방에 대한 통치는 부의 장을 통한 간접지배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지방통치조직이 마련되어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가 이루어졌다. 백제의 지방제도는 근초고왕이 영역을 분정하고 지방관을 파견해 각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지방통치조직이 담로이다. 이 담로는 종래 마한을 구성하였던 국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왕족이나 유력한 귀족이 파견되었으며 종래 국의 수장이나 읍락의 거수들은 재지세력으로 전환되어 담로에 파견된 관료들을 보좌하였다. 한성도읍기의 담로의 수는 50여 개로 추정되는데 웅진도읍기에 와서 22개로 축소되었다.
사비천도를 계기로 백제는 담로제를 방 · 군 · 성(현)제[方 · 郡 · 城(縣)制]로 재정비하였다. 방 · 군 · 성(현)제는 중앙에서 지방을 보다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방은 중방(中方) · 동방(東方) · 남방(南方) · 서방(西方) · 북방(北方)의 5방으로 구성되었고, 각 방에는 방성(方城)을 두어 방의 중심지로 삼았다. 중방은 고사성(古沙城), 동방은 득안성(得安城), 남방은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은 도선성(刀先城), 북방은 웅진성이다. 방의 장관은 방령이고,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맡았으며 보좌관으로 방좌(方佐)가 있었다. 이러한 방은 군 · 성과 중앙을 매개하는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군관구적(軍官區的) 성격을 지녔다. 방성의 내부구조는 수도와 마찬가지로 5부-5항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중방의 치소였던 고부읍성(古阜邑城) 발굴에서 발굴된 백제 기와에 새겨진 ‘上部-上巷(상부-상항)’이란 명문에서 확인된다. 5방성의 명칭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방성 | 명칭 | 현재의 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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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방성(中方城) | 고사성(古沙城) | 전북 고부 |
동방성(東方城) | 득안성(得安城) | 충남 은진 |
남방성(南方城) | 구지하성(久知下城) | 광주 또는 남원 |
서방성(西方城) | 도선성(刀先城) | 충남 대흥 |
북방성(北方城) | 웅진성(熊津城) | 충남 공주 |
〈표 4〉 오방성의 명칭과 위치 |
군은 37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군의 장으로는 군장(郡將) 3명이 있었고, 덕솔의 위계자가 임명되었다. 군 규모의 성보다 작은 단위의 것을 소성(小城) 또는 현(縣)이라 했는데, 그 장은 도사(道使)라 하였다. 소성(현)은 방성이나 군성(郡城)에 통속되어 있었다. 성(현)의 수는 200∼250개였다. 성(현)의 수가 이렇게 많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종래 사회편제 단위였던 읍락이 행정조직을 이룰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5방제는 백제 말기에 와서 5부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성격의 변화는 없었다. 멸망할 당시 백제는 5부 · 37군 · 200성(혹은 250현)이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萬戶)였다. 방 · 군 · 성(현)제의 실시로 중앙의 통치력이 보다 강력하게 지방에 미칠 수 있게 되었고 지방의 재지세력들은 군사(郡司)나 현사(縣司)에 속하여 지방관의 지방통치를 보좌하였다.
백제의 군사조직은 국단계에서는 읍락의 지배자인 거수층과 호민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일종의 명망군(名望軍)으로서 참전의 대가로 전쟁에서 획득한 노획물이나 포로 등을 분배받았다. 반면에 하호(下戶)층은 군량을 조달하였다. 오부체제가 확립되어 군사권이 국왕에게로 집중되면서 국왕의 명을 받아 군령권을 행사하는 좌장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고 또 전쟁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군사조직도 정비되었다. 근초고왕이 3만명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근초고왕은 왕도의 주민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 군사조직과 지방 주민들을 징발하여 편성한 지방군사조직을 만들었다. 대규모의 군사조직이 편성되면서 종래의 명망군적인 군대만으로는 병력을 충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초고왕은 일정한 연령층의 백성[정남(丁男)]들에게 군역 의무를 부과하고 이들을 병사로 징집하였다. 이로써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에 의한 군사충원제도가 마련되었다. 이들의 복무기간은 3년이었다.
백제의 군사조직은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와서 재정비되었다. 사비도읍기에 정비된 군사조직은 시위군(侍衛軍), 중앙군(中央軍), 지방군(地方軍)으로 나누어진다. 시위군은 국왕의 친위 군사로서 왕궁을 시키고 국왕의 행차에 호종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 시위군은 왕도에 주둔한 2,500명의 군사였다. 이 군사들은 5부에 각각 500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이 시위군은 총체적으로 위사좌평이 관장하였고 그 아래에 달솔의 관등을 지닌 자가 각 부에 배치된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중앙군은 외침을 방어하거나 다른 나라를 공격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군사력이었다. 병졸들은 왕도인을 징발하여 편성하였는데 지방민의 일부도 차출되기도 하였다. 중앙군은 청마산성, 청산성 등 사비도성의 주변에 위치한 산성에 주둔하였다.
군사조직의 운용기구로는 사군부, 병관좌평, 좌장, 장군 등이 있었다. 사군부는 내외병마를 총괄하는 관청이었고, 병관좌평은 내외의 군정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좌장은 왕명을 받아 출동하는 군부대를 지휘하는 군령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좌평이나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들이 왕명을 받아 군사권을 행사할 때는 장군을 칭하였다. 한편 최고 지방통치조직인 5방에는 각각 1,000∼1,200명의 군사 또는 7∼8백명 정도의 군사들이 주둔하였다. 이 군사들은 방의 장관인 방령이 통솔하였다. 군에도 군사가 배치되었는데 장관인 군령(軍領: 軍將)이 통솔하였고, 현에 배치된 군사는 장관인 도사(성주)가 관할하였다.
군대를 출동할 때 통솔하는 방법은 친솔형과 교견형으로 나누어진다. 친솔형은 최고 군령권자인 국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말하며, 교견형은 국왕은 왕도에 머무르고 신하들에게 군령권을 임시로 위임하여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군령권을 위임할 때 국왕의 재가를 받지 않고도 군사와 관련항 사항을 처리할 수 있는 편의종사권이 부여되기도 하였다. 군령권의 위임은 좌장에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때로는 좌평이나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도 위임받기도 하였다.
병종으로는 보병(步兵), 궁수대(弓手隊), 기병(騎兵), 수군(水軍) 등과 특수병종으로서 노군(弩軍), 충군(衝軍), 석투군(石投軍), 운제군(雲梯軍) 등이 있었다. 노군은 요노(腰弩)로 무장한 부대를, 충군은 충차(衝車)를 이용하여 성문을 공격하는 부대를, 석투군은 투석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운제군은 구름사다리를 이용하여 성벽에 오르는 부대를 말한다. 군사훈련은 평상시에는 병법에 따라 행해졌다. 때문에 군령권자가 누가 되더라도 그 지휘에 따를 수 있었다. 전렵(田獵)은 본래 사냥 놀이지만 이에 부수하여 군사훈련도 행하였다. 습사(習射)는 매월 보름과 초하루에 정기적으로 활쏘기 연습을 하는 것이다. 왕도에서 도성 서쪽에 사대(射臺)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오행에 의할 때 서쪽은 무(武)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구(武具)에는 개인 방호를 위한 갑주(甲冑)를 비롯하여 충차(衝車), 포차(砲車) 등과 같은 공 · 수성용 무기와 마구(馬具)가 있었다. 병기로는 단병기, 장병기, 속사병기, 공 · 수성용 병기가 있었다. 궁수대가 사용하는 화살대는 대나무, 싸리나무, 박달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신분제는 가문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특권과 제약이 주어진 사회적 제도이다. 백제의 신분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여 중앙귀족으로 전환시키고 중앙과 지방의 귀족들을 편제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백제의 신분은 크게 지배신분층, 평민층, 천인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배신분층은 공복의 복색과 관등제를 연결시켜 볼 때, 내부적으로 몇 개의 층으로 구별할 수 있다. 제1신분 층은 자복(紫服)을 입는 솔계 관등 이상을 소지할 수 있는 층이다. 제2층은 비복(緋服)을 입는 덕계 관등을 소지할 수 있는 층이다. 제3층은 청복(靑服)을 입을 수 있는 관등층이다. 이 가운데 지배신분층의 중심은 왕족과 왕비족이었다. 왕족은 부여족의 일파로 남하해 와서 건국한 온조계 집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왕비족은 한성도읍기 전기에는 진씨, 후기에는 해씨가 되었다. 사비도읍기에 와서는 왕족 이외에 대성팔족이 최고신분층을 형성하였다. 대성팔족은 사씨 · 연씨 · 해씨 · 진씨 · 목씨 · 백씨(苩氏) · 협씨(劦氏) · 국씨(國氏)를 말한다. 이 가운데 5∼6명으로 정원이 정해진 좌평과 30명으로 정원이 정해진 달솔은 최고 귀족신분층 출신자들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이었다.
신분제는 관등 · 관직제를 규정하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관등 · 관직 · 복색 · 대색에도 구별이 있었다. 왕은 금화로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색의 비단신을 신었다. 지배신분층 가운데 제1층은 자복을 입고, 은화로 장식한 관을 썼다. 제2층은 비복을 입었고, 자대에서 황대까지의 띠를 띠었다. 제3층은 청복을 입되, 황대에서 백대까지의 띠를 둘렀다.
이러한 귀족의 지배를 받은 피지배층의 주류는 신분적으로는 자유민인 일반 농민이었다. 농민은 소규모 토지보유자로서 농업 · 공업 · 상업에 종사했으며, 국가 수취의 주된 대상이었다. 이들은 비색이나 자색의 옷을 입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 밑에는 최하층의 신분으로서 천인과 노비가 있었다. 천민신분층은 정복전쟁과 통일전쟁의 전개과정에서 피정복민들이 천민집단으로 또는 노예로 전락되면서 성립되었다. 노비는 관노(官奴) · 사노(私奴)가 있었다. 관노는 국가 또는 관청에, 사노는 개인에게 예속되었다. 노비는 물건과 같이 취급받는 비자유인이었다. 한편 노비의 공급 및 재생산의 방법에 따라 전쟁포로 · 부채노비 · 형벌노비와 노비소생자를 노비로 삼는 세습노비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백제는 철제의 농기구 · 토목용구(土木用具)를 사용함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적 소유가 진전되었다. 이에 따라 경작지에 대한 공동체적 소유가 소멸되어 점차 개별적인 토지사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토지지배의 유형에서 상부 특권층의 토지지배에는 국가 · 왕실의 직속지, 귀족들에 대한 사전(賜田), 사원전(寺院田) 등이 있었다. 또 대귀족에 대한 식읍(食邑)의 사여(賜與)도 있었다. 전렵지인 서해대도(西海大島) · 횡악(橫岳) 등은 국왕의 직속지였을 것이다.
사원은 왕실과 귀족의 후원에 힘입어 대토지소유자로 등장하였다. 귀족들은 자신의 소유지 외에 특별한 공로로 전조권(田租權)이나 식읍을 부여받기도 했고, 새로운 토지를 개간함으로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한편 농민의 토지지배로는 농민이 개별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소규모의 경작지가 있었다. 소를 사용한 경작[우경(牛耕)]으로 토질이 개선되고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이에 농업경영 방식도 노동력이 많이 소요되는 집체적 방식에서 소농(小農) 중심의 농업경영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개별 농가가 농업경영 단위로 성장함으로써 개별 농가에 의한 토지소유가 촉진되고, 농민층의 다양한 계층분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 경작지는 국가의 각종 수탈과 귀족층의 강점(强占) 대상이 되었다. 또 빈번한 전쟁에의 동원 등으로 농토를 상실한 농민은 노비로 전락하거나 남의 농토를 용작(傭作)하기도 하였다. 토지경작은 소규모의 경작지를 보유한 자유농민에 의해 주로 이뤄졌으며 노예노동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지배는 생산력의 향상과 연관된다. 백제는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철제 농기구의 사용을 장려하고 또 우경을 행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수리관개시설(水利灌漑施設)을 정비하였다. 수리시설은 안동 저전리에서 청동기시대 저수지가 발굴된 것에서 보듯이 청동기시대부터 만들어졌다. 따라서 『삼국사기』초기기록에 보이는 수리시설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저수지 제방이라 할 수 잇다. 백제에서 본격적으로 저수지가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진 김제의 벽골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벽골제는 나뭇가지 등을 이용한 부수공법에 의해 축조되었다. 웅진도읍기에 와서 무령왕은 경제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전국의 제방을 수리하고 새롭게 축조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저수지의 축조는 많은 논에 물을 공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갈수기(渴水期)에도 물을 공급할 수 있어서 획기적인 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백제의 세제(稅制)는 조(租) · 조(調) · 역역제(力役制)로 이루어졌다. 조(租)는 농산물을 수취하는 것이고, 조(調)는 가내 수공업의 생산물이나 각 지방의 특산물을 수취하는 것이고, 역역은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조(租)와 조(調)는 결합된 형태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조조(租調)의 수취물로는 포(布) · 견(絹) · 사(絲) · 마(麻) · 미(米) 등이었고, 매년 풍흉(豊凶)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수취하였다. 역역은 국가나 지방관청에 동원되어 무상으로 노역하는 요역(徭役)과 군역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역역 징발대상은 주로 하호로 표현되는 일반민이었다. 이들은 15세 이상의 정(丁)을 부 단위로 징발되어 축성(築城)과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에 동원되었다.
조의 수취대상은 농민이었다. 백제 초기의 농민은 하호(下戶)로 불렸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국가통치체제가 갖추어지고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민의 사회경제적 지위도 변화되었다. 이에 민은 소국 수장들의 사적 수탈에서 벗어나 국가의 보호를 받는 공민적 존재로 편입되었다. 국가는 민호(民戶)를 파악하고 이렇게 파악된 호구를 토대로 편호제(編戶制)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근초고왕대에 반포되었을 율령에는 호구령(戶口令)과 부역령(賦役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비도읍기에 역역징발 업무를 맡은 관청은 사공부(司空部)였다.
백제의 수공업은 마한 시기 수공업의 기술과 생산 분야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수공업 가운데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직물 생산이다. 포의 종류에는 세포(細布)와 추포(麤布)가 있었다. 백제는 오색채견(五色彩絹)을 왜에 보냈고 또 봉제기술자인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보냈으며 관리들은 자(紫) · 비(緋) · 청(靑)색의 공복을 입었다. 이는 백제의 직조(織造) 및 염색술의 발달을 보여준다. 직기(織機)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비경이[베틀에 딸린 제구의 하나]를 통해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제철 수공업의 경우 충청북도 진천 석장리에서 초강이 만들어진 제철 유적이 발굴되었다. 또 백제가 왜에 보낸 칠지도는 백번 단련한 철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금상감으로 글자를 새겼다. 이는 백제의 뛰어난 제련기술과 상감기술을 잘 보여준다.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철정(鐵鋌) 40매와 단야(鍛冶) 기술자를 파견한 기사가 나온다. 한편 불교 전래 후 사원 · 불상 · 불화 등 우수한 불교예술품이 제작되었다. 또 도공품(陶工品)으로는 정교한 문양전(文樣塼)과 기와 · 질그릇 등이 제작되었다.
수공업 제품은 왕실이나 관청 소속의 장인(匠人)이나 노비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들은 국왕과 왕실의 생활용품은 물론 지배자의 권위를 표현하는 각종 위세품(威勢品)과 대외 교역에 수반되는 증여품을 제작하였고 또 무기와 갑옷 등 군사용품도 생산하였다. 일반민이 사용하는 토기 · 농기구와 각종 도구들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공업 기술자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자들에게 와박사, 노반박사 등과 같은 박사의 칭호가 부여되었다. 박사 칭호 소지자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미숙련자들을 교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삼베 같은 일상적인 의류 소재나 목기, 짚신 등은 대부분 일반민들이 가내에서 생산하였다. 수공업과 관련한 기구들은 내관 22부 가운데 육부(肉部) · 마부(馬部) · 도부(刀部) · 목부(木部) 등이다.
생산력이 발전하여 잉여생산물이 늘어나고 사회적 분업이 진전되면서 상업이 발전하였다. 또 도시의 발달은 물자 유통을 보다 원활하게 하였고 그 가운데 수도는 물자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물자가 활발하게 유통되면서 수도 안에 상설시장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관시(官市)이다. 그리고 원활한 물자 공급을 위해 도로교통망이 정비되었다. 왕도에서의 상업은 도시부(都市部)가 관리하였다. 한편 지방에는 향시(鄕市)가 있었다. 일정한 기간마다 열리는 이 향시에는 행상(行商)들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지방과 지방 사이에 물자를 유통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백제의 대외교역은 중국대륙과의 교역, 일본열도와의 교역으로 나누어진다. 중국과의 교역은 서진 및 동진대의 청자나 전문도기가 백제의 여러 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러한 대외교역의 활성화는 4세기 초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되어 중국 군현 중심의 교역체계가 붕괴되자 백제가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하여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왜와의 교역은 366년에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왜는 백제로부터 유학이나 불교 등 정신문화를 비롯하여 직조기술 등 기술문명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제의 교역항으로는 한성도읍기에는 한강 하구에 위치한 인천이, 사비도읍기에는 수도 웅진성이나 사비성의 관문인 금강 하구가 중심을 이루어졌다. 이외의 교역항으로는 당진 지역, 죽막동 유적이 발굴된 부안 지역, 연산강 유역의 나주와 영암 지역, 섬진강 하구의 하동 지역이 있었다. 대외교역에서는 항해의 안전이 급선무이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초월자에게 드리는 제의가 행해졌다. 태안의 백화산에 세워진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과 무속적(巫俗的) 신에 의존하여 제의를 드린 부안죽막동유적(扶安竹幕洞遺蹟)이 그 좋은 예가 된다.
백제의 대표적인 대외교역품으로서 견직물로는 오색채견 · 백금(白金) · 세포 등이, 철소재로는 철정이, 무기 · 무구류로는 각궁전(角弓箭) · 명광개(明光鎧) · 철갑조부(鐵甲彫斧) 등이, 칠제품으로는 황칠수(黃漆樹) 등이 있다. 백제가 중국의 여러 왕조로부터 수입한 물품으로는 역림 · 식점 등 서적와 요노 등 무기 및 약재, 글씨, 『열반경(涅槃經)』 등 정신문화적인 것과 도자기나 거울 등 고급 공예품 등이었다. 한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왜계 유물인 스에끼라든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드는데 사용한 금송(金松) 등은 왜로부터 수입한 것이다.
유학은 유가(儒家)의 학문이란 뜻이며, 유교는 유가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초기 백제는 낙랑군을 통해 유학이 전래되었고 비류왕대에 와서 유학을 국가통치 상에서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였다. 근초고왕대에는 박사제도(博士制度)를 설치하여 유학을 교육하고 보급하였다. 웅진 · 사비도읍기에 오면 무령왕은 오경박사를 설치하였고 성왕 때는 양(梁)나라에 모시박사 · 강례박사를 초빙해왔다. 이리하여 유학에 대한 이해 수준은 훨씬 높아졌다.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 삼년상을 치룬 것이라든가 이름에 유교 이념을 잘 보여주는 충 · 신 · 의 · 효 등을 사용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된다.
유교 교육이 확대되면서 근초고왕대에 박사 고흥은 『서기』를 편찬하였고, 위덕왕대에 와서는 『백제기(百濟記)』 · 『백제신찬』 · 『백제본기』 등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가 편찬되었다.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인 근초고왕은 왕인을 왜에 파견하여 『천자문』과 『논어』를 전수하였고, 무령왕대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성왕대에는 오경박사 왕유귀(王柳貴)를 왜에 파견하여 왜가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학을 국가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조묘(始祖廟), 종묘(宗廟), 사직(社稷), 교사(郊社), 산천제의(山川祭儀) 등 유교적 의례제도도 정비되었다. 시조묘는 건국주인 온조왕이 부여족의 족조인 동명(東明)을 모시기 위해 세웠다. 시조묘에 건국주가 아니라 부여족의 족조(族祖)를 모신 것은 백제의 특징이다. 종묘는 역대왕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신(土地神)과 곡신(穀神)을 모신 사당이다. 종묘와 사직은 유교적 제의체계의 중심이이서 왕조를 창건하면 반드시 왕도에 설치하였다.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여자형의 대형건물지는 종묘일 가능성이 크다. 교사는 교외에서 지내는 천지신에 대한 유교적 제의이다. 교사 때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단을 대단 또는 남단이라 하였다. 왕이 즉위하면 교사에서 즉위의례를 하였다. 교사에 드리는 희생제물은 소 · 돼지 · 사슴 등이었다. 산천제의는 종래의 산악숭배 신앙을 유교적 예제(禮制)에 따라 재정비한 것이다. 백제는 왕도와 전국의 산천 가운데 중요한 산천을 제사의 대상으로 하면서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누어 그 등급을 매겼다. 대사에 속한 산은 삼산(三山)인데 사비도읍기의 삼산은 일산(日山: 금성산), 오산(吳山: 오석산), 부산(浮山)이었다. 오악(五嶽)의 위치는 동악(東嶽)은 계람산(鷄藍山: 계룡산), 남악(南嶽)은 무오산(霧五山: 지리산), 서악(西嶽)은 단나산(旦那山: 월출산), 북악(北嶽)은 보령의 오서산이었고, 중악(中嶽)은 산 이름을 알 수 없는데 고부 지역에 위치한 산으로 추정된다. 이 오악은 나라의 각 방위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불교는 384년(침류왕 1)에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자 왕이 그를 예경(禮敬)함에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침류왕은 한산에 불사를 이룩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아신왕은 불법을 숭신(崇信)해 복(福)을 구하라는 하교(下敎)를 내리기도 하였다. 한성도읍기에 백제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과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蓮花文 瓦當)을 들 수 있다.
웅진도읍기에 무령왕은 교단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겸익을 인도에 보내 계율을 배워오게 하였다. 겸익이 인도에서 돌아오자 성왕은 겸익이 갖고 온 범문율부(梵文律部)를 명승(名僧) 18명으로 번역하게 하고,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게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비담신율서(毘曇新律序)」를 지어 계율의 역행(力行)을 강조하였다. 웅진도읍기의 사찰로는 대통사지가 유명하다.
백제의 불교는 사비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성왕은 사비도성을 조성하면서 시가지의 중심에 정림사(定林寺)를 창건하였고, 양나라로부터 열반(涅槃) 등 경의(經義)와 공장(工匠) · 화사(畫師) 등을 청해왔다. 법왕은 호국의 영장(靈場)으로 왕흥사를 세워 왕권강화를 추구하였고, 무왕은 익산에다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하여 미륵의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이루려고 하였다. 근래에 발굴된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은 정치적으로는 폐하, 즉 황제로 불렸음이 밝혀졌다. 불상으로는 예산사면석불(禮山四面石佛),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등이 유명하다.
불교가 성행하면서 교리 연구도 활발해 율학(律學)이 발달하고 삼론학(三論學) · 성실종(成實宗) 등이 연구되었다. 이름난 승려로는 양나라에 유학한 발정(發正), 삼론학의 대가로 일본에서 초대 승정(僧正)이 된 관륵(觀勒), 『법화경(法華經)』의 독송(讀誦)에 힘써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오른 혜현(慧顯), 중국의 형산(衡山)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운 현광(玄光), 일본에 건너가 『성실론소(成實論疏)』를 저술한 도장(道藏) 등을 들 수가 있다.
한편 백제 성왕은 왜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이후 백제에서는 많은 승려와 예술가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불교문화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법륭사 5층목탑(法隆寺五層木塔)과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창건 등은 모두 백제 기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관륵은 왜에 천문 · 둔갑(遁甲) · 방술(方術)의 서적을 전수해주었고, 초대 승정이 되어 왜의 불교교단을 정비하였다.
도교는 중국에서 후한(後漢)의 사회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던 격동의 시기에 성립되었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은 도교의 사상적 토대이자 도교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초기 백제는 서진과의 교섭을 통해 도교사상을 받아들였다. 그 시기는 황룡(黃龍)의 출현과 왕의 복색을 오행의 색깔로 한 것에서 볼 때 고이왕대로 볼 수 있다. 근초고왕대에는 장군인 막고해(莫古解)가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어 이미 4세기 중엽에 『도덕경』이 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사왕은 도교적인 원지(園池) 사상에 따라 못을 만들어 이훼(異卉)와 기금(奇禽)을 길렀다.
웅진도읍기에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鎭墓獸)와 묘지석(墓誌石)이다. 진묘수는 죽은 자를 보호하는 기능 이외에 사자(死者)의 영혼을 승선시키는 안내자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묘지석에는 왕의 무덤이 위치한 곳은 지하세계의 신인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등으로부터 산다고 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 또한 도가사상의 반영인 것이다.
도가사상은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성행하였다. 무왕은 궁남지를 축조하고, 못 속에 인공섬을 만들어 이를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기었다. 또 와전(瓦甎) 중에 산경문전(山景文塼)이 제작되고, 능산리 제6호분에는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졌다. 또 관륵이 일본에 전해준 문물 중에 둔갑 · 방술 같은 도교적인 잡술(雜術)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 뚜껑 쪽에 새겨진 문양은 주제가 신선이 살았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익산 왕궁면 왕궁리에서 발굴된 원지는 우리나라 고유의 산악숭배와 더불어 신선사상 및 도교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백제의 토속신앙(土俗信仰)으로는 소도신앙(蘇塗信仰), 농경 의례, 점복(占卜), 은(殷) 조상숭배, 제천신앙, 산천신앙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중국의 오행사상(五行思想)에 의한 오제숭배(五帝崇拜) 외에는 토속신앙의 흐름이 강하게 이어져왔다.
소도는 마한을 구성한 각 소국에 두어진 별읍(別邑)을 말한다. 이 별읍은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행해지는 곳이면서 동시에 이곳에 도망해온 자에 대해서는 사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신성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소도는 백제가 지방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하면서 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면서 별읍으로부터 지방행정조직의 하부 단위로 전환되었다.
농경의례와 관련하여서는 파종제(播種祭)와 추수제(秋收祭: 수확제)가 있다. 파종제는 5월에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하고, 추수제는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수확을 한 후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이 제의를 거행하는 때에는 수십 명이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마셨으므로 집단제의(集團祭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는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유교적 제의체계로 전환되었다. 토지신인 ‘사(社)’와 곡신인 ‘직(稷)’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을 세워 국가의 안위로 풍요를 기원한 것이 그것이다.
점복은 별자리와 달의 천체 현상, 동물의 희생 또는 골각기(骨角器)로 점을 쳐서 길흉을 살펴보는 것이다. 점복은 개인적인 목적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도 행해졌다. 점을 칠 때 사용한 뼈를 복골(卜骨)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역림과 식점을 새로이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점을 치는 방법도 종래의 복골이 아니라 식반을 이용하여 점을 치게 되었다.
백제에서는 용신앙(龍信仰)도 행해졌다. 용은 수신(水神)의 상징이다. 용신앙은 용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풍농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또 바다에는 용왕이 산다고 생각하고 용왕에게 풍어제(豊漁祭)를 지내고 또 항해에서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용왕에게 제사를 드렸다.
백제에서는 남근숭배신앙(男根崇拜信仰)도 행해졌다. 남근은 악귀를 내쫓기도 하고 신에게 봉헌(奉獻)하는 봉헌물이기도 하였다. 남근숭배신앙은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을 보여준다. 능산리폐사지(陵山里廢寺址)에서 발굴된 목간 가운데 발기된 남근에 각서와 묵서(墨書)가 있는 목간은 교차로 설치하여 마을의 수호와 자손 번영, 교통안전을 지켜주는 것으로 관념화 되었다.
백제에서는 산천에 신이 있어 마을을 지켜주고 나라를 지켜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한시기에는 각 국보다 자신의 영역 범위 내의 산천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백제 왕실의 입장에서 산천제의가 정비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제의 국도에 있던 산천은 그 격이 격상되어 대사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방에 위치한 산천은 일부만 오악에 편제되었고 그렇지 못한 산천은 제외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묻히게 된다. 죽어서 무덤에 묻히기까지 진행되는 의식과 예절이 상례(喪禮)이다. 「무령왕릉묘지석」에 의하면, 왕이 죽자 27개월 동안 빈전에 시신을 두었다. 이 기간을 거상(居喪)이라 하는데 3년 상이었다. 3년 동안 시신을 빈전에 두었다는 것은 백제 상례의 특징이다. 기와 건물지와 벽주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얼음을 저장한 시설도 발견된 공주정지산유적(公州艇止山遺蹟)은 바로 빈전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시신을 묻을 곳을 정한 후 돈으로 지하 신들에게 장지(葬地)를 사서 세상의 법률에 얽매이지 않도록 계약한 후 길일(吉日)을 택하여 매장하였다. 죽어서 마지막 무덤에 묻기까지 상주(喪主)들은 상복을 입었다. 상복 기간은 망자(亡者)와의 혈연적 친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부모와 남편이 죽었을 경우 자식이나 부인은 3년간 상복을 입었다. 그러나 나머지 친척들은 장례와 동시에 상복을 벗었다.
시신을 묻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 백제의 무덤은 크게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봉토분(封土墳)으로 크게 나누어지고, 봉토분은 다시 석실분(石室墳: 돌방무덤) · 석관묘(石棺墓: 돌널무덤) · 토광묘(土壙墓: 움무덤) · 옹관묘(甕棺墓: 독무덤)로 구분된다. 적석총은 서울 석촌동이나 양평 문호리, 연천 삼곶리 등에서 확인되었다. 이 적석총들은 만주의 집안에 있는 고구려 적석총과 맥을 같이 한다. 석촌동 제3호분은 동서 55.5m, 남북 43.7m의 평면에 현재의 높이가 4.5m인 대형 적석총으로서 3단까지 추적할 수 있다.
웅진도읍기로 오게 되면 적석총은 없어지고, ‘ㄱ자형’ 석실분과 장방형 석실분이 유행하고 중국계통의 전축분(塼築墳)이 축조되었다. ‘ㄱ자형’ 석실분은 돔(Dome)형식에 벽에 회칠을 했으며, 장방형 석실분은 순수 백제식 석실분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전축분으로는 사신도가 그려진 송산리 제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무령왕릉은 터널형 전축분으로 연도가 달려 있다.
사비시대로 오게 되면 ‘ㄱ자형’ 석실은 없어지고 연도가 달린 상자형 석실이 주류를 이룬다. 왕실 무덤은 능산리에 조성되었는데 현재 7기가 남아 있다. 중하총(中下塚)은 석제로 터널형의 석실을 만들었는데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하총(東下塚)은 네 벽 및 천장을 잘 물갈이한 편마암 판으로 축조했고, 석면(石面)에 사신과 연화문을 직접 그렸다.
영산강 하류인 나주시와 영암군 내에서는 대형 옹관묘의 군집이 있다. 이 옹관묘들은 초기철기시대 이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동일 봉토 내에 여러 개를 합장(合葬)한 것이 주류이다. 옹관의 형식에는 단옹(單甕)과 합구식(合口式)이 있다. 이 가운데 나주 신촌리 제6호분은 금동관 · 금동식리(金銅飾履) · 철도(鐵刀) 등의 부장품이 나와 이 지방의 유력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외에 이 지역의 특징적인 무덤양식으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백제 귀족설, 왜계 백제관료설 등이 있다.
백제의 토목 기술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성곽(城郭), 고분, 제방 등 대규모 토목물이다. 성은 축조 재료에 따라 목책(木柵), 토축성(土築城), 석축성(石築城)으로 나뉜다. 이러한 성 가운데 축조 모습을 생생이 보여주는 것이 왕성인 풍납토성이다. 축조공정을 보면 생토 모래층 위에 형성된 점토층(粘土層)을 기저부로 삼아 전체적으로 정지작업을 한후 그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중심 토루(土壘)를 쌓아 올리고 이를 기준으로 삼아 내 · 외면에서 비스듬하게 점질토(粘質土)와 사질토(沙質土)를 교대로 쌓아올렸다. 최하층에는 점성이 강한 점토를 깔고 나뭇가지와 같은 식물을 10여 차례 이상 반복하여 깔았다. 이를 부엽공법(敷葉工法)이라 하는데 성벽의 안전성과 토층 사이의 결합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풍납토성 축조에 사용된 부엽공법은 이후 토성 · 제방 축조에 사용되었다. 사비도읍기에 만들어진 나성도 동쪽 부분은 부엽공법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제 벽골제의 제방도 발굴 결과, 부엽공법에 의해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백제의 건축물로는 실물이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사서에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이 대다수이다. 이 가운데 건물지가 확인된 것으로는 한성도읍기의 경우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종묘로 보이는 제의 건물지, 웅진도읍기의 경우 공산성 내에서 확인된 임류각지(臨流閣址)와 왕궁지(王宮址), 사비도읍기의 경우 익산 왕궁리에서 발굴되고 있는 궁성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경당지구의 제의 건물지는 ‘여(呂)’자형의 건물로서 주변에 도랑을 파서 외부와 격리하고 있다.
백제의 건물지는 가람(伽藍)에 많이 남아 있다. 몇몇 사지(寺址)가 발굴 결과, 군수리사지는 목탑지(木塔址)로 생각되는 방형의 기단을 중심으로 중문(中門) · 금당(金堂) · 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 · 강당을 회랑(回廊)으로 연결해 탑과 금당을 둘러싼 일탑식(一塔式) 가람배치였다. 이와 같은 일탑식 가람배치는 금강사지(金剛寺址), 정림사지(定林寺址), 왕흥사지(王興寺址), 능산리폐사지의 발굴조사에서 분명히 밝혀졌다. 미륵사지는 발굴 결과, 중앙에 목탑이 있고 현존하는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조 동탑이 있었음이 밝혀져 3탑 · 3금당(三塔三金堂)이라고 하는 삼소(三所) 가람의 형식을 취하였다.
현존하는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석탑이다. 석탑은 목탑에서 비롯되었는데 정림사지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과 미륵사지석탑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목조건축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다. 초층(初層) 탑신(塔身)의 부재(部材)는 목조건물의 부재를 모방해 모두 다른 돌을 사용했고, 기둥 위의 3단 층개(層蓋)받침은 공포를 번안한 것이고 옥개석(屋蓋石)이 넓게 퍼져 추녀 끝이 들려 있음도 목조건축의 추녀와 같다.
조각과 공예는 재질에 따라 석조, 금속공예, 토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불상 조각으로는 금동불(金銅佛)과 납석상(蠟石像) 석불(石佛), 소조불(塑造佛) 등이 남아 있다. 한성도읍기 불상으로는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는 이 좌상은 북위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웅진도읍기에 와서 서산 보원사지출토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은 일광삼존불상(一光三尊佛像)으로 추정되는데 북위식 복제를 하였다. 사비도읍기에 와서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은 광배(光背)에 정지원(鄭智遠)이 죽은 처를 추복(追福)하기 위한 명문이 있는데 산동성 제성(諸城)에서 출토된 동위(東魏)의 불상과 닮았다. 부여 군수리사지 목탑의 지하 심초석(心礎石) 부근에서는 납석제 여래좌상과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이 발견되었다. 부여 신리에서는 봉보주보살상(捧寶珠菩薩像)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봉보주보살상은 남조와 백제 사이의 문화적 친연성(親緣性)을 잘 보여준다.
석불은 거대한 마애불(磨崖佛)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예산 사면석불은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하고 3면에 여래입상을 각각 1구씩 조각한 것이다. 사면불(四面佛)임에도 전 · 후 · 좌 · 우가 모두 조각된 입체상처럼 입체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상반신은 광배와 넓은 거리를 두고 있고 팔은 따로 조각하여 부착하였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서해에 면한 백화산 정상의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서 가운데에 작은 봉보주관음상(捧寶珠觀音像)을, 좌우에 키가 크고 체구가 당당한 여래입상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6세기 말에 만들어진 이 불상은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이 지역의 유력세력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본존(本尊)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봉보주보살은 관음보살(觀音菩薩), 반가사유형보살(半跏思惟形菩薩)은 미륵보살(彌勒菩薩)로 추정된다. 7세기 작품이다. 본존은 부드럽고 친근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수인을 하고 있다. 이외에 익산 연동리의 불상에서 화려한 광배의 화염문(火焰文)과 7구의 화불의 배치는 일본 법륭사 금당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의 광배와 상통한다.
공예품으로는 도검, 장신구 및 토기 · 기와 · 전 등을 들 수 있다. 근초고왕대에 제작된 칠지도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있는데 한일고대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유물이다. 여기에 새겨진 금상감명문은 백제에서 상감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금동관모(金銅冠帽)는 공주 수촌리에서 2점, 서산 부장리에서 1점, 고흥 길두리에서 1점, 천안 용원리에서 1점, 익산 입점리에서 1점, 나주 신촌리에서 1점 등이 발굴되었다. 금동관모의 특징은 정면이 뾰쪽하고 옆에서 보았을 때 반원형을 띠는 고깔형이다. 이 가운데 수촌리와 부장리의 것은 금동판을 투조하여 용과 봉황 등을 표현하였고 입점리와 신촌리의 것은 타출기법(打出技法)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제작 시기의 차이를 반영한다. 수촌리형의 관모는 일본의 강전선산(江田船山) 고분에서도 발굴되었다. 금동신발은 원주 법천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고흥 길두리에서 출토되었다. 수촌리와 법천리는 투조기법(透彫技法)으로 ‘T자형’의 무늬와 용문을 새겼고 입점리나 신촌리에서는 타출기법을 사용하였다.
웅진도읍기의 경우 공예의 진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부장품이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금제관식(金製冠飾) · 금제귀걸이[金製耳飾] · 은제팔찌[銀製腕飾] · 은제탁잔(銀製托盞) · 두침(頭枕) · 족좌(足座) 등이 출토되었다. 금제관식은 연화문,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 화염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얇은 금판의 영락에 구멍을 뚫고 금실[金絲]을 꿰어 관식의 겉면을 장식하였다. 왕비의 귀걸이는 중심고리와 노는 고리에 이어 화려한 중간식, 그리고 수하식으로 이어지는 형태이다. 은제팔찌는 겉면에 두 마리의 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연결되었는데 비늘이나 발톱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안쪽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卅朱耳”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520년라는 제작 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다. 동탁은잔(銅托銀盞)은 동제 받침에 은잔을 붙인 것인데 손잡이 꼭지는 연화 봉우리 형태로 만들었고, 그 아래에 연잎이 조각되어 있으며, 몸통에는 산과 기금과 용 등이 표현되어 있는 걸작이다.
사비도읍기의 공예품으로는 금동합(金銅盒), 장신구, 금동화판(金銅花板), 은제관식 등을 들 수 있다.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사리합(金銅舍利盒)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577년에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목탑을 건립하고 사리를 공양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사리기는 청동사리합(靑銅舍利盒), 은제사리호(銀製舍利壺), 금제사리병(金製舍利甁)으로 구성되었고 이외에 8,150점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공헌되었다. 이 가운데 관모는 투명한 운모와 금판을 여러 번 포개어 연화의 자방과 연판을 표현한 장식을 부착하고 있다.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공에서는 금동제사리봉안기(金銅製舍利奉安記)를 비롯하여 금동제사리호(金銅製舍利壺)와 장식도자, 소형 금판 등이 출토되었다.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비인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왕의 건강을 위해 발원하여 서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소형 금판에는 금 1만을 시주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은제관식은 좌평에서 나솔에 이르기까지 고위 관료들이 착용한 관모에 장식한 것이다. 장식의 형태는 줄기, 가지, 꽃봉오리, 꽂을 대, 꼭대기의 꽃 등으로 정형화되었다. 특히 부부가 나란히 매장된 능산리의 한 고분에서는 부부 모두가 사용한 은제화형 장식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토기는 고구려 · 신라의 토기와 뚜렷이 구별되는 부드러운 곡선과 정교한 문양, 그리고 때로는 회백색의 기표(器表) · 색조(色調)에서 오는 온건한 조형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흑도(黑陶) 같은 토기가 생산되기도 하였고, 중기 이후에는 삼족기(三足器)가 만들어졌고, 후기에는 청록색 또는 황갈색의 유약을 바른 시유토기(施釉土器)가 제작되었다. 이들 시유토기는 신라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와당은 목조건축의 성행과 더불어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낙랑계(樂浪系)의 영향을 받았으나 6세기 중엽에는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서울 광장동에서 발견된 고식의 연화문 와당을 비롯해 와당에 새겨진 모든 연화는 모가 없이 우아하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한편 풍납토성에서는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한 와당이 출토되었다. 미륵사지 · 금강사지 등에서 발견된 연화문 연목와(椽木瓦), 부여 가탑리 출토의 귀면문(鬼面文) 연목와 등의 연화는 매우 아름다게 표현되어었다. 또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녹유를 시유한 와당은 이 건물이 매우 고급스러운 것임을 보여준다.
전(塼)은 묘실축조로 사용되고 있다. 전의 표면에는 기하학적 문양과 연화 · 인동문(蓮花 · 忍冬文) 등이 조각되었다. 표현수법은 다른 유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온건 · 우아한 품위가 나타나 있다. 이밖에 전돌로는 부여에서 발견된 연화 · 인동문의 상형전(箱形塼)과 부여 규암면 출토의 방형문양전(方形文樣塼)이 있다.
백제의 회화는 고분에 그려진 벽화 및 무령왕릉 출토품에서 그 대략을 살펴볼 수 있다. 공주 송산리 제6호분은 벽화분인데 전축분으로 벽화를 그릴만한 자리에 진흙을 칠하고 면회(面灰)한 위에 먹과 채색으로 사신도를 그렸다. 지금은 회가 떨어지고 색이 퇴색되어 거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 사신도는 고구려가 아닌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에는 왕비 두침에 세화(細畫)가 그려져 있다. 이 세화는 두침 표면을 옻칠한 다음 귀갑문(龜甲文)을 치고 그 안에 비천(飛天) · 어형(魚形) · 조형(鳥形) · 연화 등을 그렸는데, 어느 것이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도 생동하는 기운을 나타내고 있다.
능산리 동하총 석실분은 곱게 물갈이한 판석으로 조립한 무덤인데 네 벽에 사신도와 천장에 연화와 구름무늬가 그려졌으나 현재는 거의 없어져 백호(白虎)의 머리부분과 연화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연화는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형식이고 운문(雲文)은 비운(飛雲)인데 꼬리가 길게 끌린 양식이 연판(蓮瓣)의 형식과 더불어 고구려와의 연관을 느끼게 한다.
백제의 화가로는 왜에 건너간 아좌태자(阿佐太子)와 백가가 있다. 아좌태자는 왜에 가서 쇼토쿠태자상[聖德太子像]을 그렸다고 한다. 한편 백제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각종 기술자와 화사(畵師)를 청해와 자신의 문화 수준을 높혔다.
백제의 서예는 기와나 돌에 새겨진 문자, 칠지도를 비롯하여 금속에 새겨진 명문, 목간에 쓰인 문자 등에 의해 살펴볼 수 있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전돌에 새겨진 ‘直’, 토기에 새겨진 ‘大夫’와 ‘井’이라는 글자와 토제(土製) 벼루는 백제가 일찍부터 문자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무릉왕릉에서 출토된 묘지석의 글자는 남조와 북조의 해서(楷書)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무령왕릉 왕비 두침에 쓰여진 ‘甲’과 ‘乙’은 유려하면서 분방한 필체를 보여준다.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는 사육변려문(四六騈儷文)으로 쓰여졌는데 자체는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이다. 한편 최근에 많이 발굴되고 있는 목간에는 다양한 서체들이 쓰여 있어 서예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편 『남사(南史)』에 의하면 양나라에 파견된 백제 사신이 당시 왕희지체(王羲之體)를 계승한 유명한 서예가 소자운(蕭子雲)에게 금화 수백만을 주고 30여 개의 글씨를 받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백제 왕실과 귀족들이 서예에 매우 심취해 있던 정황을 보여준다.
1980년 이래 백제사 연구 현황은 박사학위논문의 제목을 통해 그 대략적인 흐름을 볼 수 있다. 1980년 이후 백제사와 백제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30여명이 되는데 논제(論題)들을 보면 정치사, 제도사, 영역확장사 등이 중심이었다. 근래에 금석문 관련 연구라든가, 불교 관련 논문들이 제출되고 있다. 이는 백제사 연구자들의 관심 분야가 정치사 중심에서 보다 다양한 주제로 확대되어가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고학 분야의 경우 묘제나 고분을 주제로 한 경우나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금강 유역, 호남 동부, 전라남도 동부 지역 등 각 지역에서 조사 · 정리된 고고자료를 토대로 그 지역의 모습을 밝히려고 한 논문도 나오고 있는데, 이 또한 관심 분야의 확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사 연구는 연구자의 수적 증가, 고고자료의 증가에 힘입어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쏟아졌으며 연구 수준도 심화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연구되어 온 성과들을 종합 · 정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근래에 와서 몇몇 연구 기관에서 이러한 종합 · 정리 작업의 결과를 출간하였다.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에서는 1997년의 『백제의 중앙과 지방』, 2000년의 『백제사상의 전쟁』, 2003년의 『고대 동아세아와 백제』와 『한국의 전방후원분』 등 학술대회를 개최한 결과를 단행본으로 꾸준히 묶어 내고 있다. 백제문화개발연구원에서는 제1권 『백제의 언어와 문학』에서 제28권 『목간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별책으로 『사료로 보니 백제가 보인다(국내편)』 · 『사료로 보니 백제가 보인다(국외편)』와 『최근 발굴한 백제유적』에 이르기까지 31권의 역사문고를 출간하였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는 제1권 『백제사 총론』에서 제15권 『백제의 건축과 토목』에 이르기까지 총 15권으로 이루어진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백제사 연구의 전반적인 흐름을 개관한 것에서부터 백세사의 전개 과정을 정치사 편과 생활 · 문화사 편으로 나누어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전반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에서는 제1권 『성격과 문화기반』에서 제5권 『생활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총5권으로 이루어진 한성백제사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한성도읍기의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총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작업이다.
고고학자료를 중심으로 백제사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작업으로는 도록을 들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2002년에 『특별전 백제』를,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2002년 『백제의 문자』에서부터 2006년 『백제의 공방』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주제를 고고학 자료로 정리한 교양서를 출간했다. 전라북도 · 전북문화재연구원은 2003년에 『전북지역 백제문화유산』을, 경기도박물관에서는 한성도읍기의 백제관련 유적 유물을 정리하여 2006년에 『한성백제 묻혀진 백제문화로의 산책』을, 국립공주박물관 ·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공주 수촌리 고분발굴을 계기로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위세품을 중심으로 2006년에 『한성에서 웅진으로: 4∼5세기 백제유물 특별전』을 펴냈다. 최근에는 부여 지역뿐만 아니라 익산 · 나주 지역에서 목간이 출토되었다. 이 목간에는 개인 차원의 습자에서부터 국가 행정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종합한 것으로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가 2004년에 펴낸 『한국의 고대목간』과 국립부여박물관이 2009년에 펴낸 『나무 속 암호 목간』이 있다.
백제는 고대동아시아 공유문화권(共有文化圈) 형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문헌자료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더불어 중국 및 일본 지역에 남아 있는 백제의 유적과 유물을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이루어낸 해외 소재 백제 관련 유적 · 유물의 조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소재 백제문화재 조사보고서(日本所在 百濟文化財 調査報告書)Ⅰ』(국립공주박물관, 1999)
『일본소재 백제문화재 조사보고서(日本所在 百濟文化財 調査報告書)Ⅱ』(국립공주박물관, 2000)
『일본소재 백제문화재 조사보고서(日本所在 百濟文化財 調査報告書)Ⅲ』(국립공주박물관, 2002)
『일본소재 백제문화재 조사보고서(日本所在 百濟文化財 調査報告書)Ⅳ』(국립공주박물관, 2004)
『백제문화 해외조사보고서(百濟文化 海外調査報告書)Ⅴ』-중국 강소성 · 안휘성 · 절강성(中國 江蘇省 · 安徽省 · 浙江省)-(국립공주박물관, 2005)
근래 2009년에는 백제학회가 창립되어 관련 학자들의 관심과 지원 속에서 월례발표회학술대회를 개최하고 학보를 발간하는 등 백제사 연구의 지평은 넓어지고 있으며 전망도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