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王興寺)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있었던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이다. 2007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의 명문을 통해 왕흥사가 577년 위덕왕 때 창건됐다는 것이 밝혀졌다. 왕흥사는 백제 사비기의 전형적인 가람 구조를 가진 사찰이며, 백제 정치사와 불교 문화 연구를 위한 중요한 유적이다.
왕흥사(王興寺)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있었던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이다. 왕흥사의 위치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1934년에 현 왕흥사지에서 ‘왕흥(王興)’ 2자가 양각(陽刻)된 고려시대의 기와편이 발견되었고, 2001년 그곳에서 다시 왕흥명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되어 이 지역이 왕흥사터임을 알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왕(法王, 599∼600)이 왕흥사를 창건하고 3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또한 무왕(武王, 600∼641) 때 왕흥사가 완성되었는데, 물가에 세워진 이 절은 장식이 장엄하고 채색이 화려하였으며 왕이 자주 배를 타고 절에 들러 향불을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여 무왕이 완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이 두 기록에 의거해 법왕 2년에 왕흥사가 창건되어 무왕 35년에 절을 낙성(落成)한 것으로 파악해왔다.
그러나 2007년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에서 577년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목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왕흥사가 창건된 시기를 위덕왕 때로 추정하게 되었다.
한편,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무왕(武王)」과 권3 「흥법(興法) 법왕금살(法王禁殺)」에는 ‘왕흥사를 미륵사라고도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두고 『삼국사기』의 법왕과 무왕 때 왕흥사에 대한 기록을 미륵사에 대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왕흥사 앞 언덕에는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바위가 있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가서 예불(禮佛)을 드리고자 할 때에는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절을 하였다. 그때마다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이 바위를 자온대(自溫臺)라 하였다고 한다. 백제가 멸망하기 전, 이 절의 승려들은 큰 배 같은 것이 물을 따라 절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멸망한 후, 이 절을 기점으로 항거하던 백제 잔병 700명이 무열왕에 의하여 7일 만에 사살되면서 절도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따라서 왕흥사는 백제 왕실의 비호 아래 있던 대찰(大刹)이었다가 백제의 멸망과 함께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폐허가 된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왕흥사가 있던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 1934년에 ‘왕흥(王興)’이라는 명문(明文)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수습되어 절이 있었던 곳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왕흥사지는 1982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사적 제427호로 승격되었다.
2000년부터 백제 문화권 주요 유적 학술 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왕흥사 발굴 조사(發掘調査) 중장기 계획이 수립되었고, 2015년까지 15차에 걸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로써 사찰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 및 제반 시설의 배치와 규모, 왕흥사를 짓는 데 사용한 기와를 생산했던 가마터 등이 확인되었다.
왕흥사는 남북 중심축 선상에 탑과 금당, 강당을 배치하고 그 양옆으로 회랑 및 동 · 서 건물, 강당 양옆으로 부속 건물을 배치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탑터는 사역의 중심에 자리하였다. 회랑터는 목탑지를 중심으로 각각 동편과 서편에 있었다. 부속 건물터는 승방(僧房)으로 추정된다. 왕흥사의 중심 사역에서 동편으로 150m 떨어진 외곽 지역에서는 기와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가람(伽藍)의 배치의 형태는 다른 백제 사찰인 능산리사지, 군수리사지, 정림사지에서 보이는 가람 배치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