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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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수행의 결과로 생겨난다고 여겨지는 구슬 모양의 유골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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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참된 수행의 결과로 생겨난다고 여겨지는 구슬 모양의 유골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내용

유신(遺身)·신골(身骨)이라고도 한다. 사시(死屍) 또는 유골을 말하는 것으로서 ≪현응음의 玄應音義≫ 제6에는 “사리는 바로 설리라(設利羅)라고 하며 번역하여 신골이라 한다.”고 하였다.

사리는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형태에 따라 전신사리(全身舍利)와 쇄신사리(碎身舍利)를 말하고 있다. 즉 신체 자체로 볼 때는 전신사리이고 다비(茶毘)한 뒤의 신골은 쇄신사리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쇄신사리는 세골(細骨) 내지 흰 분말의 경우가 있으나, 북방불교 계통에서는 사리신앙이 더욱 신비화되어 둥근 구슬의 형태로 된 영골(靈骨)·영주(靈珠)로 인식되었다.

즉 황금색의 분말에서부터 진주와 같은 구슬에 이르기까지 다비 후의 유신(遺身)이 사리로 신봉되었다. 보통 불사리(佛舍利)를 으뜸으로 말하고 있으나 그 외 수행자의 유신인 고승의 사리 역시 신봉되어 탑을 만들기도 하였다.

대체로 이 같은 신골사리 외에 부처님의 교설인 불경이 법사리(法舍利)로서 신봉되어 신골사리와 함께 불탑(佛塔) 속에 봉안된다. 부처님의 신골을 진신사리(眞身舍利), 불경을 법사리, 고승의 사리를 승사리(僧舍利)라 하여 구분하고, 승사리를 봉안하는 곳은 부도(浮屠)라고 하여 뒤에 와서는 불탑과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석가모니의 열반 뒤 그 제자들은 인도의 장례법에 의하여 유신을 다비하였더니 8곡 4두(八斛四斗)나 되는 많은 사리가 출현하여 이를 8국에 분배하여 봉안하였고, 그 뒤 아소카왕(阿育王) 때에는 팔만사천의 불사리탑을 건립하는 등 사리신앙이 매우 성행하였다.

또 ≪대당서역기≫에는 현장(玄奘)법사가 돌아올 때 여래의 육사리(肉舍利) 150립(粒)을 가져왔다고 하였으며, 의정(義淨)도 사리 300립을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서역으로부터 불골(佛骨)이 전해져서 사리신앙이 널리 행하여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549년(진흥왕 10)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불사리를 보내왔으므로 왕이 백관과 함께 흥륜사(興輪寺)에서 맞이하였다는 것이 사리 전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 뒤 안홍(安弘)이 진(陳)나라에 들어가서 법을 구하고 호승비마라 등과 함께 귀국할 때 ≪능가경 楞伽經≫·≪승만경 勝鬘經≫과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636년(선덕왕 5)에 당에 들어간 자장(慈藏)은 오대산 태화지(太和池) 가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불정골(佛頂骨)과 치아(齒牙)사리 등을 받아서 645년(선덕왕 14)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건의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오대산 중대에 적멸궁을 건립하고 그 지하에 정골을 봉안하였다. 그 밖에 월정사,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지리산 화엄사, 영월 사자사에 사리탑을 건립하였다.

751년(경덕왕 10)에는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에 사리를 봉안하였고, 그 뒤 신라 후기 및 고려시대에도 사리신앙이 매우 성행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사리에 관한 신앙은 왕실을 중심으로 매우 성행하였다. 태조가 대신에게 “사리가 어찌하여 생기느냐?” 하고 묻자, 하륜(河崙)이 “정기가 쌓인 것입니다. 사람이 정신을 수련하면 다 사리가 있습니다. 바다의 조개도 보주(寶珠)가 있고 뱀도 명월주(明月珠)가 있으니 조개와 뱀이 무슨 도가 있어서 그런 구슬이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자 왕이 웃었다고 하였다.

태조는 1393년(태조 2) 정릉 흥천사(興天寺)에 사리각(舍利閣)을 건설하고 7일 동안 기도하였는데, 그 때 사리 4매(枚)가 분신(分身:여러 개로 나뉨)하여 불당을 유동(楡洞)에 건립하고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1398년에는 명 태조가 황엄(黃儼)을 사신으로 보내어 사리를 구하므로 왕은 각도 감사에 명하여 사리를 구해 들이게 하였다.

충청도에서 45매, 경상도에서 164매, 전라도에서 155매, 강원도에서 90매를 모았으며, 또 태조가 가지고 있었던 사리 303매를 함께 주자 황엄이 고개 숙여 감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각 사찰에서 구한 것과 함께, 모두 800매를 도금한 금은합 속에 넣어 보냈다고 한다. 1415년(태종 15) 왕이 불(佛)의 진위를 실험하기 위해 승려 100명을 흥천사 사리각에 모아 기도하면서 사리의 분신을 기원하게 하였다. 1419년(세종 1) 태종이 흥천사 탑 안에 사리를 봉안하였다.

석가 생존시 이[齒] 사이에서 나온 치사리 4매와 두골·패엽경(貝葉經) 및 가사 중에서 패엽경과 가사는 내불당(內佛堂)에 안치하고 두골과 치사리만 탑에 두었다고 하였다.

1446년 4월에는 광천사(廣天寺)에 있던 사리 10매를 내원당으로 가지고 와서 봉안하였다. 1450년(문종 1)에는 사리를 깊이 신앙한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사리탑을 조성하기 위해 시주를 얻으려 하다가 관으로부터 경고를 받은 일도 있었다.

특히 세조 때에는 사리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이 많이 전하고 있다. 개성의 연복사(演福寺) 승려가 사리라고 진상한 함을 열어보니 좁쌀이었다고 한다. 1464년(세조 10)에 삼각산 장의사에서 사리가 분신하므로 백관이 서한을 올려 경하하였는데, 이 날 오색구름이 나타났다고 한다.

같은 해 5월에는 효령대군이 회암사(檜巖寺)에서 원각법회(圓覺法會)를 베푸는데 여래가 현상(現相)하고 탑이 방광하면서 채색구름이 공중에 가득하였으며, 사리가 수백 매로 분신하였다. 그리고 그 사리를 함원전(含元殿)에서 공양하는데 또 수십 매가 분신되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이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 세조는 양평에 용문사를 중창하고 사리탑을 세웠으며, 양주에는 수종사(水鐘寺)를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웠다. 그리고 양양 낙산사에서 37일 기도하는데 공중에서 사리 4매가 떨어지므로 낙산 해안 홍련암(紅蓮庵)에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세조가 세운 사리탑은 수십 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 뒤에도 사리신앙은 매우 성행하였으며, 불상에 대한 신앙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에 대한 신앙이 매우 강하였다. 근년에는 경상남도 사천다솔사(多率寺) 후불탱화에서 사리 수십 매가 나오고, 경기도 양주군보광사(普光寺) 후불탱화에서도 수십 매의 사리가 나왔으며, 구미도리사(桃李寺) 부도탑에서도 세존사리 1매가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이조실록불교초존』(권상로 편, 보련각, 1976)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장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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