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수령궁(壽寧宮)이 있던 곳인데 충렬왕이 1277년(충렬왕 3) 궁을 절로 바꾸어 민천사라 할 것을 명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09년(충선왕 복위 1) 9월충선왕이 수령궁에서 1만 반승(飯僧:식사를 대접함)을 베푼 뒤 모후(母后)의 추복(追福)을 위하여 민천사로 바꾸었다. 그 뒤 고려 왕실의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수많은 불사를 행하였고, 공민왕 때까지 여러 차례의 반승재(飯僧齋)가 개설되었다.
1310년원나라 사신의 감독 아래 방신우(方臣祐)가 승속 300여 명을 이 절에 모아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사경(寫經)하였고, 1312년 왕이 모후를 추복하기 위하여 금자장경을 사경하게 하였으며, 1313년양광도·전라도·서해도에서 500명의 장정을 뽑아 연경궁(延慶宮)에서 불상을 주조하게 한 뒤 봉안하였다.
또, 1317년(충숙왕 5)자정국존(慈淨國尊)을 모시고 대강당에서 『삼가장소(三家章疏)』를 강하게 하였으며, 충혜왕이 원나라의 간섭으로 왕위를 물러나게 되자 재상과 승려들이 이 절에서 복위를 위한 불공을 드리기도 하였다. 1335년(충혜왕 복위 4) 왕이 이 절의 누각에 올라갔다가 불씨를 남겨 누각이 소실되었다.
충목왕과 충정왕도 이 절을 즐겨 찾아 행향(行香:향을 올림)하였고, 1353년(공민왕 2)공민왕이 인왕도량(仁王道場)을 개설하여 왜적을 진병할 것을 기원하였으며, 김원명(金元明)이 도병(徒兵)을 거느리고 강지(薑池)를 중수할 때는 거대한 돌을 절 반대편에서 운반하기도 하였다. 폐허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래 전부터 주택지로 바뀌었다.
출토 유물로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과 불상이 있다. 용머리돌은 선죽교 연지(蓮池)에 옮겨졌는데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웅장하여 후대 유물에서는 보기 어려운 보물이다. 청동 도금한 아미타여래좌상은 개성박물관에 보관되었는데, 불상의 상호(相好)가 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