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 때 창건하였으며, 삼국시대 절 가운데 백제의 절로는 최대의 규모이다.
백제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행차하였을 때 용화산(龍華山)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으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왕비가 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청하였으므로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움으로 못을 메워 절을 창건하였다. 2013년부터 시작된 보수정비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절을 창건한 사람이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절에는 미래불인 미륵이 3회의 설법으로 미래의 중생을 모두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龍華三會說)에 입각하여 전(殿)과 탑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이 절터는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化公主)와의 설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으나, 719년(성덕왕 18) 9월금마군(金馬郡)의 미륵사탑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전한다. 이는 미륵사의 탑에 벼락이 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1407년(태종 7) 나라에서 여러 고을의 자복사찰(資福寺刹)을 정할 때 충청북도 청주의 보경사(菩慶寺),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의 진구사(珍丘寺) 등의 여러 사찰과 함께 자복사찰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사찰이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절터에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과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절터 전체는 196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2년 절터 주변에 흩어진 옛 석재들을 일부 재사용하여 동탑(東塔)을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