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택적덕(沙宅積德)은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의 장인으로, 좌평(佐平)을 역임하였다. 2009년 1월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 따르면 그는 사택왕후(沙宅王后)의 아버지로 명기되었다. 이를 통하여 사택적덕은 백제 무왕 치세에 권력의 핵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택적덕은 좌평으로서 사택왕후의 아버지였다. 사택적덕의 딸은 아버지의 정치적 실력을 배경으로 무왕의 비가 될 수 있었다. 사택적덕의 사택씨(沙宅氏)는 사탁씨(沙矺氏)라고도 불리며, 중국식 단일성으로 표기할 때는 사씨(沙氏)이다. 『수서(隋書)』백제조에는 백제의 유력한 여덟 가문인 대성팔족(大姓八族)을 열거할 때 사씨를 가장 먼저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사택씨(사씨)는 사비시대 백제에서 가장 유력한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택씨의 부상은 사비천도(泗沘遷都)와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성왕의 사비천도를 도왔으며, 나아가 그들의 활동 근거지가 사비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귀족가문으로 등장하였다.
무왕 때 사택씨는 왕후를 배출하였으며 이 무렵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는 사택적덕 외에 의자왕 때 대좌평(大佐平)을 지낸 사택지적(砂宅智積)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사택지적은 사택적덕과 형제간 혹은 한 세대 아래라는 견해가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음이 분명하다. 사택적덕이 좌평, 사택지적이 대좌평을 지낸 사실에서 사택씨 가문이 백제 말기 권력의 중추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택적덕은 무왕 말기에 사택왕후와 더불어 익산 미륵사 창건의 후원자가 되었다. 미륵사 창건에는 사택적덕을 필두로 한 사택씨 가문의 재력(財力)이 밑바탕이 되었으며, 특히 사택적덕이 왕실의 외척으로서 무왕의 익산 지역 경영을 보좌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