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본춘초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백제 멸망 후 왜국에서 대산하를 역임한 유민. 유신(遺臣).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달솔|대산하(종6위)
관련 사건
백제부흥운동
목차
정의
삼국시대 백제 멸망 후 왜국에서 대산하를 역임한 유민. 유신(遺臣).
생애 및 활동사항

답본춘초(答㶱春初)는 백제 멸망 당시 달솔(達率)로, 병법에 능한 인물이었다. 백제부흥운동은 한 때 당나라 군사력을 고립무원의 상태에 이르게 할 정도로 대부분의 백제 옛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부흥운동군 지휘부의 내분과 나당연합군의 반격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부흥운동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이 백제를 구원하러 온 왜군을 따라 일본 열도로 이주하였다. 답본춘초도 그중의 하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답본춘초는 663년 9월 왜 수군(水軍)의 인도를 받아 좌평(佐平) 여자신(餘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보수(谷那普首), 억례복류(憶禮福留) 등과 함께 저례성(弖禮城)에 이르러 왜국으로 향하였다. 665년 8월에 그는 나가토국〔長門國: 지금의 山口縣〕에 파견되어 성을 축조하였다. 병법에 기반한 축성에 능한 공로로 671년 정월 곡나보수·억례복류 등과 함께 야마토정권〔大和政權〕으로부터 종6위하에 해당하는 대산하(大山下)를 제수받았다.

답본춘초가 백제에서 한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그가 병법에 능했다는 표현과 백제부흥운동의 지도자인 여자신을 따라 이주한 것을 보면 무관직을 지냈으며, 부흥운동에도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야마토정권에서 활약한 것은 나당연합군의 일본 열도 침공을 염려한 대책 수립과 관련이 있다. 야마토국은 664년 관문에 해당하는 츠쿠시〔筑紫〕지역에 미즈키〔水城〕를 쌓았다. 이어 세토내해〔賴戶內海〕로 진입하는 입구인 나가토국에 답본춘초가 성을 쌓았고, 억례복류와 사비복부(四比福夫)가 스쿠시국의 오노〔大野〕와 키〔椽〕에 성을 축조하였다. 이들이 쌓은 성은 전형적인 백제식 산성으로, 부여의 부소산성(扶蘇山城) 토루(土壘)와 비슷한 축조 방법이다. 답본춘초가 백제식 산성을 축조함으로써 대산하 직을 받은 것은 일본 열도의 방어 전선 구축에 그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 부흥운동 연구』(김영관, 서경문화사, 2005)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Ⅲ』(김현구 외, 일지사, 2004)
『백제부흥운동사』(노중국, 일조각, 2003)
「일본속의 백제계 유적과 유물」(西谷正,『백제문화』38, 2008)
『日本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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