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윤귀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백제의 고위 관등인 하좌평을 역임한 관리. 대신.
이칭
이칭
군윤귀(君尹貴)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하좌평
관련 사건
임나부흥회의
목차
정의
삼국시대 백제의 고위 관등인 하좌평을 역임한 관리. 대신.
생애 및 활동사항

목윤귀(木尹貴)는 백제의 고위 관등인 하좌평(下佐平)을 역임하였다.『일본서기(日本書紀)』흠명기(欽明紀) 4년(543)조에 의하면 백제 성왕이 군신(群臣)을 모은 후 왜에서 요청한 임나부흥(任那復興)에 대해 논의하는 회합을 열었다. 이때의 임나부흥회의는『일본서기』편찬자의 윤색을 감안하면, 당시 가야·왜 관계 등을 고려한 백제의 대외정책 회의였다고 보인다. 이 회의에는 상좌평(上佐平) 사택기루(沙宅己婁), 중좌평(中佐平) 목리마나(木刕馬那), 하좌평 목윤귀, 덕솔(德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덕솔 동성도천(東城道天), 덕솔 목례미순(木刕眯淳), 덕솔 국수다(國雖多), 나솔(奈率) 연비선나(燕比善那) 등 백제의 고위 관리 등이 참석하였다. 이 중 목윤귀는 세 번째로 언급이 되고, 관등 또한 고위직인 하좌평이었다. 그는 당시 군신회의에서 사택기루, 목례마나에 이어 3번째로 높은 귀족이었고, 하좌평은 좌평 내의 서열로 보인다.

한편,『일본서기』계체기(繼體紀) 23년(529)조에 의하면 백제는 장군 군윤귀(君尹貴)와 마나갑배(麻那甲背), 마로(麻鹵) 등을 안라(安羅)에 파견하였다. 이때의 군윤귀를 목윤귀와 동일한 인물로 본다면, 목윤귀가 가야·왜 문제 등을 전담한 사절단의 대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백제 조정 내에서 하좌평이라는 고위직을 맡은 것도 이를 방증해둔다. 그의 성인 목씨(木氏)는 목례(木禮)·목협(木劦)·목라(木羅)씨 등과 같은 계통으로, 중국식 단일 성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목씨의 세력 근거지로는 이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가야 혹은 목지국(目支國)의 후예로 보는 입장이 있다. 목씨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격했을 때 문주왕과 함께 구원병을 모집하려고 남쪽으로 내려간 목협만치(木劦滿致)가 보인다. 사비천도 전후에도 목윤귀 외에 중좌평 목례마나가 활약하였다.『수서(隋書)』백제전에 백제의 여덟 개의 유력한 가문〔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도 명기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결과일 것이다. 이와 같은 목씨의 세력기반으로 목윤귀는 성왕 때 가야·왜 등 백제의 외교정책을 책임지는 사절단의 중책을 맡았으며, 조정 내에서도 중신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Ⅱ』(김현구 외, 일지사, 2003)
『백제정치사연구』(노중국, 일조각, 1988)
「백제의 귀족가문 연구-목협(목)씨 세력을 중심으로-」(노중국,『대구사학』48, 1994)
「백제인명고」(이홍직,『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1971)
『隋書』
『日本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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