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택왕후(沙宅王后)는 익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작업 도중 2009년 1월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명문을 통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녀는 백제의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서 백제 무왕의 정실 왕비였다. 무왕 치세 후반에 미륵사(彌勒寺) 창건을 주도하였음이 밝혀졌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사택왕후는 재물을 희사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639년(무왕 40)에 사리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의 비는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아니었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아울러 사택왕후와 그녀의 가문은 무왕 후기에 정국을 주도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후의 성인 사택씨(沙宅氏)는 사탁씨(沙矺氏)라고도 불리며, 중국의 단일성으로 표기할 때는 사씨(沙氏)이다. 사택왕후가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사씨의 정치적 후광 때문이었다. 이는 왕후를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명기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수서(隋書)』백제전에 백제의 유력한 여덟 가문〔대성팔족(大姓八族)〕을 열거할 때 사씨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도 사씨가 정국을 주도하였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따라서 무왕은 정치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사택왕후를 비로 맞이하여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인다.
그런데『일본서기(日本書紀)』황극기(皇極紀) 원년(642)조에 의하면 의자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백제에서 정변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때 의자왕의 어머니는 사택왕후이며, 따라서 사택왕후의 죽음이 의자왕 초기 정치적 변동의 촉발제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하여 사택왕후가 의자왕 초기에 사씨 세력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