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택기루(沙宅己婁)는 백제 최고의 관등인 상좌평(上佐平)을 역임하였다.『일본서기(日本書紀)』흠명기(欽明紀) 4년(543)조에 의하면 백제 성왕이 군신(群臣)을 모은 후 왜에서 요청한 임나부흥(任那復興)에 대해 논의하는 회합을 열었다. 이때의 임나부흥회의는『일본서기』편찬자의 윤색을 감안하면, 당시 가야·왜 관계 등을 고려한 백제의 대외정책 회의였다고 보인다. 이 회의에는 상좌평 사택기루, 중좌평(中佐平) 목례마나(木刕馬那), 하좌평(下佐平) 목윤귀(木尹貴), 덕솔(德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덕솔 동성도천(東城道天), 덕솔 목례미순(木刕眯淳), 덕솔 국수다(國雖多), 나솔(奈率) 연비선나(燕比善那) 등 백제의 고위 관리 등이 참석하였다. 이 중 사택기루는 제일 먼저 언급되고 있고, 관등 또한 최고위인 상좌평이어서 성왕 때 백제 최고의 귀족임이 확인된다.
그의 성인 사택씨(沙宅氏)는 사탁씨(沙矺氏)라고도 불리며, 중국의 단일성으로 표기할 때는 사씨(沙氏)이다.『수서(隋書)』백제조에는 백제의 유력한 여덟 가문〔대성팔족(大姓八族)〕을 열거할 때 사씨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씨는 사비시대의 가장 유력한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씨로는 한성시대에 좌장(左將)인 사두(沙豆)가, 웅진시대에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택기루처럼 최고의 귀족으로 등장한 예가 없기 때문에 사씨의 부상은 사비 천도(泗沘遷都)와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사씨는 성왕의 사비천도를 보좌했으며, 나아가 그들의 활동 근거지가 사비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귀족가문으로 등장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를 통해 사택기루는 군신회의의 수석으로 대외정책을 주관하였으며, 사씨의 정국 주도와 관련하여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