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천도는 538년(성왕 16) 백제 성왕이 도읍지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사건이다. 사비는 현재 충남 부여로, 방어에 유리하지만 협소한 웅진에 비해 넓은 평야지대와 금강을 통한 해상교통로를 갖추고 있어 동성왕대부터 관심을 가진 곳이었다. 천도를 실현한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목적으로 부소산성, 왕성 등을 축조하고 체제정비와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성왕은 70년 만에 한성을 회복하기도 하였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며 중흥을 실현하지 못했다. 사비천도는 성왕이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체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백제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웅진천도(熊津遷都)는 475년 고구려군에 의한 불시의 한성(漢城) 공격에서 비롯되어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방어에 유리한 군사적 측면은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천도 직후부터 일어난 일련의 정치불안으로 왕권이 쇠약해지고 금강의 범람 등으로 인한 자연재해 피해가 잇달았다. 또한 도성(都城)이 협소하여 왕도(王都)로서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웅진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538년(성왕 16) 성왕이 단행한 사비천도(泗沘遷都)이다.
사비 지역은 금강을 통해 중국이나 왜국과 연결되는 해상교통로 상의 중요한 요지였고, 특정한 세력이 없는 미개발지역이 많았다. 그리고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서 왕권의 안정은 물론 새로운 백제국가 건설을 위해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 성왕이 백제의 중흥을 이루기 위해 이에 걸맞는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면서 사비로의 재천도(再遷都)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백제 웅진시대에 사비 지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동성왕대의 일이었다. 그러한 관심의 표현은 사비에서의 빈번한 사냥 실시와 가림성(加林城) 축조를 통해 표출되었으나 천도를 추진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어 무령왕대에는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회복하였으나 대고구려전(對高句麗傳)에 국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한성고토 회복에 보다 큰 관심을 가졌다. 이때의 사비 지역은 왕실에서 필요한 용품을 만드는 웅진의 배후 생산기지로서 기능을 수행하였다.
사비 지역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여 천도 대상지로 정한 이는 성왕이었다. 성왕을 도와 사비천도를 주도한 세력은 무령왕 소가계집단인 성왕계 왕족들, 사씨(沙氏) · 목씨(木氏) · 연씨(燕氏)와 같은 대성(大姓) 귀족, 그리고 근시관료와 신진세력이었다.
성왕 즉위초에 먼저 사비천도를 결정하고 이어 마련된 천도계획에 따라 신도읍지 건설에 착수하는 과정을 거쳤다. 사비 도성에 해당하는 부소산성(扶蘇山城)을 먼저 축조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왕궁 · 능사(陵寺) · 사원 · 간선도로 등 도읍지의 기반시설들을 차례로 조영하였다.
성왕은 사비천도를 통해 지배질서 확립과 왕권강화를 이룩하려 하였고, 백제중흥을 염원하였다. 아울러 중흥의 성취를 위해 여러 방면에서 체제정비를 추진하였다. 중앙의 16관등제와 22부제 실시, 지방통치조직인 방 · 군 · 성제(方郡城制) 실시, 불교교단 정비 등의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551년(성왕 29)에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 공격을 추진하여 70여년만에 한성고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비밀리에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한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이로 인해 554년(성왕 32)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신라 매복병에 의해 시해되었다. 성왕의 죽음과 함께 백제의 중흥은 미완의 개혁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비천도는 단기간에 임기응변적으로 단행된 웅진천도와는 달리 성왕이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체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백제사상 큰 의미를 갖는다. 사비천도의 배경과 추진 과정의 해명은 성왕대에 추진된 이른바 중흥정치의 내용과 성격을 규명하는데 관건이 된다.
사비천도로 인한 백제 사비시대 정치사의 전개과정은 한국 고대국가 정치개혁의 한 모델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