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3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00~641년이며, 제29대 법왕의 아들이자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재위 초부터 동진정책에 주력하여 신라의 여러 지역을 함락시켰다. 수·당·왜와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나 수나라의 고구려 침입 때는 신라의 역습을 우려하여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사비궁 중수나 왕흥사·미륵사 창건 같은 대규모 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왕권이 안정·강화된 시기였다. 신라에 대한 압박은 신라와 당이 결합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무왕(武王) 즉위 직전의 혜왕(惠王)과 법왕은 모두 재위 1년 만에 죽었다. 위덕왕(威德王)은 45년 동안 집권하다가 598년 12월에 죽었고, 70여세가 넘은 위덕왕의 동생 혜왕이 598년 12월에 즉위했다. 혜왕은 이듬해 599년에 죽고 이어 혜왕의 아들인 법왕이 즉위했는데 법왕도 이듬해인 600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 간에 내분이 일어났으며 왕실 권위가 약화되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이 무왕의 즉위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麻)를 캐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서동(薯童)이 지략을 발휘하여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백제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즉위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무왕의 즉위에도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41년간에 달하는 무왕의 재위 기간에 왕권이 안정되었는데, 이는 무왕 재위 기간 동안 집요하게 추진해 온 신라 침공과 같은 정복 전쟁에서의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무왕은 소백산맥을 넘는 통로의 확보에 치중했다. 602년과 603년에는 신라와의 아막산성(阿莫山城) 전투가 있었는데, 이 전투에서 좌평(佐平) 해수(解讎)는 4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였다. 아막산성은 소백산맥으로 통과하는 중요한 통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백제-신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제로서는 상당히 심혈을 기울인 전투였으나 해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아막산성 전투에서 좌평 해수의 참패는 무왕의 권력을 회복시키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좌평 해수가 4만 병력을 손실한 것은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3만 병력을 잃은 것보다 더 컸다. 이로 인해 무왕은 귀족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무왕은 차츰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624년 백제는 소백산맥을 넘어 함양으로 진출하였다. 백제가 함양으로 진출했다는 것은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된다. 무왕은 636년 독산성(禿山城)을 기습하여 함양을 점령한 후 동남쪽으로 진출하여 진주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던 듯하다. 함양의 동북쪽으로는 낙동강 영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하고, 함양의 동남쪽으로는 낙동강 하류 영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무왕은 신라 서쪽 변방을 빈번하게 침공함으로써 백제군이 낙동강 방면으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백제는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 무왕의 영역 확대는 결과적으로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적인 유착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나,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정복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무왕 대의 백제는 국제 문제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무왕은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강화된 왕권의 표징으로, 또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役事)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궁(泗沘宮)을 중수했으며,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그 안에 인공 섬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같은 해 그 무렵 백제의 중심적인 사원으로서 웅장하고 화려했다는 왕흥사(王興寺)도 완성되었다. 이 절은 600년 법왕이 착공한 뒤에 죽자, 아들인 무왕이 30여 년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왕흥사는 절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왕이 건립을 주도했고 몸소 불공을 드린 곳으로서 왕실의 원찰(願刹) 또는 왕과 특별히 밀착된 사원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역사는 왕권의 안정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므로 귀족 내부의 분쟁 요인 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되는 것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을 뜻한다. 대왕포(大王浦)라는 지명과 함께, “무왕과 신하들이 그 곳에서 흥겹게 어우러져 즐겼다”는 고사는 표면적으로 태평한 백제 지배층의 정황을 잘 보여준다.
무왕은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 지역을 중시해 이 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遷都)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성이 될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익산에 축조하는 동시에, 흔히 궁성 안에 있어서 내불당(內佛堂)의 성격을 띠는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또한 2009년 1월 14일에 미륵사지 석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 의하면, 정실 왕후 사택씨(沙宅氏) 세력의 보시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동방 최대 규모의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음이 밝혀졌다.
미륵사지는 거의 20여년에 걸쳐 발굴되었다. 그 결과 사찰구조가 3탑 3금당의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탑의 층수도 9층이었음이 밝혀졌다. 최근에는 신라의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건립이 신라의 삼국통일 의지를 상징해주듯이, 미륵사의 구층탑 건립도 이와 연결될 수 있으며 미륵사의 3원 건립도 백제를 중심으로 한 삼국의 공존과 세력균형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미륵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무왕과 왕비(후궁으로서 선화공주)가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도중 연못 속에서 솟아오른 미륵삼존상(彌勒三尊像)을 만나 이를 모시기 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륵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백제 어느 지역의 연못에서 솟아 나왔다는 점이다. 백제는 미륵불국토(彌勒佛國土)를 이룰 수 있었던 인연이 깊은 땅이었는데, 이를 실현시켜준 인물로서 무왕이 추앙되었다. 미륵불국토의 실현은 오랜 전쟁으로 지친 백제민들에게 앞으로의 전생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미륵불국토의 실현을 위해서 희생된 자신이 다시 미륵에 의해서 구제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다. 비록 익산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관산성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 왕권을 구축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무왕 때의 백제는 정복 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사비궁의 중수나 왕흥사 · 미륵사의 창건 같은 대규모 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비시대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위치에 있는 무왕은 흔히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서동설화 속의 무강왕(武康王)과 관련 짓고 있다. 그런데 서동설화는 여러 시대의 전승들이 복합,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커서 단순한 일원적 해석은 위험하다. 예컨대 동성왕(東城王)과 관련된 혼인 설화와 무왕 대의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 외에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 지역의 담로장(擔魯長)으로서 이 지역을 다스린 데서 생겨난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라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의 능은 익산시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에 이미 도굴된 적이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 능산리 고분의 묘제와 일치함이 밝혀졌다. 무왕의 능을 통해 그가 익산 태생이며 그의 성장기반이었던 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익산을 중시했던 점을 고려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