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쌍릉은 해발 40m 내외의 낮은 구릉에 180여 m의 거리를 두고 자리한 2기의 굴식돌방무덤이다. 고분의 약 900m 북편에는 용화산에서 이어진 오금산 줄기의 말단 봉우리가 있다. 약간 먼 곳의 산지를 배경으로 전면 평지나 야트막한 미고지(微高地)에 능원이 형성되어 있다. 봉분이 우뚝하게 솟아 있는 모습은 부여 능산리 고분군 등 일반적인 사비기 백제 고분군과는 차이가 있다.
대왕릉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바 있으나 2018년에 이루어진 재조사로 여러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봉분은 점질토와 사질토를 10~15㎝ 내외 두께로 번갈아 성토하였는데, 다진 상태가 익산제석사지 목탑의 기단에 버금갈 만큼 정교하다. 현재 남아 있는 원 모양의 봉토 높이는 약 380㎝ 정도이다. 백제 사비기 돌방무덤에서 이렇게 봉분이 지상으로 높게 솟은 사례는 매우 드물다.
한편, 소왕릉도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어 돌방은 대왕릉과 구조가 거의 같은데, 분구와 돌방 모두 대왕릉에 비해 작은 편이라는 점만 지적되었다. 2019년에 재발굴 조사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소왕릉은 남쪽으로 약간 경사진 능선에 자리하는데, 봉분 주위에는 넓게 성토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이 묘역의 남쪽 낮은 부분에만 잘 다듬은 널돌을 활 모양으로 20여 m 돌려 놓았다. 이 널돌은 무덤길을 흙으로 메운 후 돌려 세웠다. 따라서 널돌 열의 성격은 봉분의 둘레돌보다는 성토 묘역의 경계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소왕릉은 성토 묘역과 봉분의 2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대왕릉의 돌방은 봉분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 돌방은 기반층을 다듬으며 일정한 두께로 성토한 다음 무덤구덩이를 파고 구축하였다. 정지층은 봉분을 벗어나 넓게 조성되어 있다. 정지층을 기준으로 보면 돌방이 거의 지하에 자리하지만, 기반층을 기준으로 하면 3분의 2 정도가 지하로 들어간 반지하식에 가깝다. 완전한 지하식인 사비 돌방과 전혀 다른 양상이다.
돌방은 평면 장방형, 단면 육각형이며 평천장이다. 석재는 모두 화강암제로, 표면은 고운 정다듬하여 매끄럽다. 북벽은 1매의 널돌, 동서 긴 벽은 각 2매의 널돌과 그 위의 장댓돌 각 1매로 구성되어 있다. 북쪽 짧은 벽에는 검은색의 먹선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천장은 2매의 널돌로 덮었고, 바닥에는 잘 치석한 거의 같은 폭의 널돌을 3매 깔았다. 바닥 가운데에 화강암제 관대(棺臺)가 하나만 설치되었는데, 길이 268㎝, 너비 82㎝, 높이 24㎝ 내외이다.
널길은 길이 67㎝로 바깥쪽으로 살짝 벌어졌다. 원래 널방과 널길 입구에 모두 1매의 널돌을 세워 막았는데, 널방 문비의 가장자리에는 백회가 남아 있었다.
돌방 입구 쪽인 남측은 돌방 구축, 시신 매장과 관련하여 넓고 길게 무덤길이 마련되어 있다. 무덤길은 길이 21m로 봉분 범위를 넘어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 마련된 평탄면이 끝나는 지점까지 이어진다. 사비의 왕릉 등 백제의 어떤 돌방무덤에서 보이는 것보다 길고 넓은 무덤길이다. 무덤길의 바닥은 거의 수평을 이룬다.
어느 정도 성토한 후 무덤구덩이를 판 점이나 매장 시설이 원래의 지면보다 일부라도 위에 있는 점, 저평한 구릉의 평탄면에 무덤이 조성된 점 등은 단독 능원제나 봉분 고대화를 기대한 축조 기획에서 연유하였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같은 시기 주변의 귀족급 돌방무덤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소왕릉의 봉분은 지름 13m, 백제 때 조성된 봉토의 잔존 높이는 2.3m 정도로 회백색 사질점토(沙質粘土)와 적갈색 사질점토를 번갈아 가며 수평으로 쌓아 올린 판축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대왕릉과 비슷하다.
돌방은 봉분의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단면 육각형 굴식돌방무덤이다. 규모는 길이 343㎝, 너비 128㎝, 높이 175㎝로 대왕릉 돌방의 규모(길이 400㎝, 너비 175㎝, 높이 225㎝)에 비해 작은 편이다. 측벽 2매, 바닥석 3매, 천장석 2매, 안벽 1매, 고임석 1매로 짜여 있다. 석재 가공 역시 치밀한 편이다.
돌방은 지하에 구축되었으나 천장석이 원래의 지반 높이에 자리하여 그렇게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돌방의 바닥 중앙에는 화강암을 다듬은 1매의 관대(길이 245㎝, 폭 63㎝, 높이 20㎝)가 놓여 있다.
널길은 길이 45㎝로 짧은 편이다. 돌방은 널길 입구와 현문에서 각각 널돌을 이용하여 이중으로 폐쇄하였는데, 이는 대왕릉과 같은 양상이다.
무덤길은 돌방 입구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너비 4~5m, 최대 깊이 3m, 길이 15m이다. 성토하여 마련한 남쪽 묘역을 되파기하여 길을 내었다. 점질토와 사질점토를 번갈아 쌓아 폐쇄하였다. 바닥에는 가운데를 따라 잘게 부순 돌을 채운 속도랑 형태의 배수구가 마련되어 있다. 무덤길은 돌방 입구 쪽이 약간 높은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익산쌍릉의 돌방은 2기 모두 단면이 육각형을 이루고, 고운 정다듬한 널돌만을 사용하였으며, 널길은 짧은 전형적인 능산리식 돌방이다.
한편, 백제 굴식돌방무덤에서 정교하게 다듬은 널길 관대는 왕릉군인 능산리 고분군에서만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널길 1매로 된 관대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중상총뿐이어서 익산쌍릉 피장자의 위상과 매장 시기를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돌방의 장폭비가 크고 관대가 하나인 점 등은 익산쌍릉이 단장이 유행한 능산리 고분군의 늦은 단계에 해당하는 것을 보여 준다.
부여 능산리 왕릉군에 비해 익산쌍릉은 더 큰 돌방이 매장 시설로 사용되었다. 정교하게 재단하고 다듬은 석재를 이용하여 백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돌방을 만든 점은 대왕릉이 백제 최상위 계층, 즉 왕의 무덤이었음을 증언한다.
대왕릉에서 출토된 나무널도 무령왕릉 이후 왕릉에만 사용하는 금송으로 만들어졌다. 금송은 왜의 특산물이다. 왜에서도 이용에 규제가 따른 금송을 백제 왕권이 다량으로 입수하고 독점적으로 이용한 체제가 존재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익산쌍릉(대왕릉) 피장자의 신분은 왕족임이 분명하다.
익산쌍릉은 묘 · 장제뿐만 아니라 옥장신구와 같은 껴묻거리, 사람 뼈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 그리고 익산과 무왕의 관계를 통해서도 무왕과 그 비의 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