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태간리 자라봉 고분 ( 자라 )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삼국시대 영산강 유역에 축조된 전방후원형 고분.
이칭
약칭
자라봉고분, 영암태간리고분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백제
소재지
전라남도 영암군
시도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지정기관
전라남도
종목
시도기념물(2001년 9월 27일 지정)
소재지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태간리 747번지
내용 요약

영암태간리자라봉고분(靈巖泰澗里자라峰古墳)은 삼국시대 영산강 유역에 축조된 전방후원형 고분이다. 5세기 말~6세기 전엽에 독무덤이 유행한 영산강 유역 중심 지역에 축조되었다. 무덤 모양은 왜에서 유행한 전방후원분을 따랐으나 전방부의 형태가 조금 다르고, 매장 시설은 영산강 유역의 다른 전방후원형 고분과 달리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구덩식돌방무덤 혹은 앞트기식돌방무덤이어서 독특한 양상이다.

정의
삼국시대 영산강 유역에 축조된 전방후원형 고분.
발굴경위 및 결과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태간리 747번지에 자리하는 전방후원형 고분이다.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매장 시설을 발굴 조사한 바 있으며, 2011년과 2015년에 분구 축조 기술, 도랑의 형태 등을 파악하여 정비 자료를 얻고자 대한문화재연구원이 다시 발굴 조사하였다.

고분은 영산강 하류의 동쪽 기슭에 펼쳐진 낮은 구릉지대의 작은 골짜기에 자리한다. 이곳은 영암천과 영산강을 통해 바다로 통할 수 있는 곳이다. 호남 서남부 지역에 분포하는 대부분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독무덤이 유행한 반남 등 영산강 중하류 지역을 에워싸듯 그 외곽에 분포하는 데 비해 영암태간리자라봉고분은 독무덤이 유행한 중심 지역에 있다.

형태와 특징

무덤 모양은 일본 고분시대에 유행한 전방후원분과 흡사하다. 다만, 영산강 유역의 다른 전방후원분과 달리 전방부의 폭이 매우 좁고 짧은 특징이 있다. 분구 주위에는 무덤 모양에 맞게 도랑이 돌아간다. 분구 규모는 전체 길이 37m, 원부(圓部)의 직경 24m, 높이 4.6m, 허리부 너비 11m, 방부(方部)의 너비 20m, 높이 2.4m이다. 영산강 유역에 축조된 전방후원형 고분 중에서는 중소형에 속한다.

분구는 무덤 모양에 맞추어 정지하고 가장자리를 따라 두둑 형태의 토제(土堤)를 쌓고 내부를 채웠는데, 구역을 나누어 성질이 다른 흙을 교대로 다져 쌓았다. 분구 높이의 중간 지점에서는 니질의 점토 덩어리를 쌓기도 하였다. 원부를 먼저 쌓고 이에 덧대 방부를 쌓았다.

중심 매장 시설은 원부에 있으며 구덩식돌방무덤 혹은 앞트기식돌방무덤이다.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매장 시설이 모두 왜와 관련된 규슈계〔九州系〕 앞트기식돌방무덤인 점과 대비된다. 돌방은 분구를 성토한 후 되판 다음 축조되었는데, 바닥면이 2m 정도 지상에 자리한다.

돌방은 길이 326㎝, 너비 236㎝, 높이 190㎝로 평면 장방형(장폭비 1.36)이며, 각 벽은 위로 가면서 내경(內頃)하였다. 벽면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멩이나 깬돌로 쌓았는데 돌 사이의 틈에는 점토가 채워져 있다.

한편, 네 벽을 축조하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벌어지는 무덤구덩이 벽과 돌방 벽면 사이에는 돌과 흙을 채웠는데, 윗부분은 폭 1.5m 정도로 상당히 넓게 쌓여 있다. 이렇게 무덤구덩이와 돌방 벽면 사이에 넓게 돌을 쌓는 것은 왜계(倭系)의 묘제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분구 성토 후 되파기하여 돌방을 축조한 것은 고흥안동고분이나 영암옥야리장동고분에서 보이는 구축묘광(構築墓壙)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분구 중에 돌방이 자리하는 점은 백제 중앙 및 분구묘 전통을 보이는 서해안 지역 이외의 지방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특징이다.

위로 올라가면서 벽면을 안으로 줄여 쌓아 천장이라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 것은 돌방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것은 각 벽면 모서리 상단의 말각(겹쳐쌓기) 현상으로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인 구덩식돌덧널무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당초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암태간리자라봉고분의 매장 시설이 구덩식돌방무덤일 가능성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동벽의 상단에 다른 부위와 축석 상태가 다른 부분이 U자 모양으로 보이며, 돌방 남동쪽에 무덤길로 볼 만한 통로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덤길로 추정한 부분이 돌방과 접속하는 곳은 돌방의 모서리 부분이고 이곳에 분명한 앞트기 부분이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돌방은 천장석 높이보다 높게 분구를 성토한 다음, 이를 되판 후 축조되었으므로 이곳이 돌방 축조, 시신 안치나 의례를 위해 출입할 통로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영암태간리자라봉고분의 매장 시설이 앞트기식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시신을 직접 안치한 시설은 꺾쇠의 존재로 보아 나무널로 추정된다. 한편 돌방의 동남쪽에서 대용관이 1기 확인되었는데, 토층으로 보아 돌방 조성과 함께 안치된 것으로 판단된다.

돌방 안에서는 금귀걸이, 유리구슬, 토기류, 철기류 및 동물 뼈가 출토되었다. 토기 가운데 뚜껑접시는 해남월송리조산고분 등 영산강 유역 초기 대형 굴식돌방무덤의 등장과 함께 새로 부장되기 시작한 형식이 포함되어 있다. 반남에서 유행한 뚜껑접시도 보인다. 도랑에서는 스에키〔須惠器〕 계통의 뚜껑접시도 출토되었다.

한편 도랑에서 다량의 하니와〔埴輪〕 모양의 원통형토기가 출토되었다. 아가리가 바깥쪽으로 구부러지고 돌대 한 줄이 돌아가며 그 아래에 삼각형의 투창이 돌아간 화분형의 상부에 원통형의 하부가 부착된 형태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명화동장고분 출토품과 유사한데, 상부에 비해 하부가 짧고 폭이 좁아져 차이를 보인다. 나주신촌리9호분과 명화동장고분 출토품의 중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원통형토기 이외에 도랑에서 출토된 목제품도 주목된다. 원부 북서쪽 도랑의 가장 깊은 곳(1.5m 깊이)에서 출토되었는데, 이곳이 장례를 위해 진입하던 시점에 의례를 행하던 곳이었음을 시사한다.

목제품으로는 삿갓형 수립물(樹立物) 2점과 작은 말목으로 고정한 듯한 5m 이상의 장대 2점이 출토되었다. 삿갓형 수립물은 일본 고분시대에 유행한 목제 하니와와 유사한데, 특히 일본 나라〔奈良〕 지역에서 5세기 말~6세기 전반에 유행한 것과 비슷하다. 단 삿갓 모양 장식이 위아래로 장고처럼 두 점이 겹쳐 있는 것은 다르다. 장대는 아직 유례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의의 및 평가

무덤 모양과 돌방 일부에서 왜계 요소가 보이나 비슷한 형태의 돌방이 공주수촌리고분군, 고창봉덕리1호분에서도 보이고, 왜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나무널을 사용하였으므로 이 고분의 축조에 왜는 물론 백제가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껴묻거리로 보아 5세기 말~6세기 전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돌방이나 무덤 모양이 백제나 왜에서 직접적인 계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다. 또한 껴묻거리에서 현지 요소가 함께 나타나고 있으므로 무덤의 주인공은 현지인일 가능성이 높다.

전방후원형 고분이면서 백제계로 볼 수 있는 돌방을 매장 시설로 사용한 영암태간리자라봉고분은 무덤 모양이 바로 피장자의 출자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므로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李暎澈, 林智娜, 高卿珍, 『靈巖 泰間里 자라봉 古墳』(대한문화재연구원, 2015)
姜仁求, 『자라봉古墳』(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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