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4월 20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광주 명화동고분’으로도 불린다. 1992년 겨울 향토사가 김희규 씨의 신고로 처음 알려졌고, 국립광주박물관에 의해 1993년과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조사되었다.
1993년 수습조사는 원형부 둘레 밭에 노출된 도랑〔周溝〕일부에 대한 것이었고, 1994년 발굴조사는 분구와 원형부의 매장시설, 나머지 도랑에 대한 것이었다.
유적이 위치한 명화동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서남쪽에 있는 평동 저수지의 상류인데, 동산동을 사이에 두고 나주군 노안면과 근접해 있다. 고분은 평동 저수지의 상류에 있는 화동마을 뒤 구릉(약 40m)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분의 주변에는 함평 초포리유적, 화순 대곡리유적, 송절동 주거지, 신창동유적, 나주 반남면고분군, 요기동 조산고분 등이 분포한다. 이 고분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같이 방부(方部)와 원부(圓部)의 분구로 이루어진 소위 장고형고분(長鼓形古墳, 長鼓墳)이라는 점이다. 광주·전남지방에서 발견된 고분 중 장고형의 뚜렷한 봉토형태를 갖춘 것은 10여 기에 달한다.
대표적인 예는 해남 방산리 장고봉고분, 용두리 말무덤, 함평 죽암리 장고산고분, 예덕리 신덕고분, 영암 태간리 자라봉고분, 광주 명화동고분, 월계동 장구촌고분 등이 있다. 장고형고분으로서 명화동고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은 요기동 조산고분과 월계동 장구촌고분이다.
명화동장고분은 구릉의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성토해서 구릉과 함께 고대상(高臺狀)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분구의 장축은 남북방향에서 26°기울어져 있다. 분구의 평면형태는 장고형, 즉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을 이루고 있다. 그 중 방형부는 북서쪽, 원형부는 남동쪽을 향하고 있다.
분구의 규모는 전체 길이 33m, 원형부 높이 2.73m, 원형부 직경 18m, 연결부분 높이 1.87m, 연결부분 폭 12m, 방형부 높이 2.73m, 방형부 폭 24m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조사된 광주·전라남도지역의 장고형고분 중 최소형의 분구이다.
원형부의 직경에 대한 방형부 선단폭의 비율은 1 : 1.33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광주·전라남도지역의 장고형고분 중 방형부의 폭이 가장 확대된 형태의 분구이다.
분구는 완전한 성토분으로서 원형부와 방형부가 동시에 축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생토층 위에 미사질 점토로 수평층을 만든 뒤, 분구의 가장자리를 따라 둑을 돌려 쌓고 그 내부를 충전시키는 성토방법이 확인되었다.
한편, 원형부와 방형부를 잇는 연결부분의 동쪽 측사면에서는 원통모양토기 열(列)이 50㎝ 정도의 간격으로 직립되어 세워져 있는 것이 조사되었다. 이 토기들은 성토층을 약간 파고 그 위에 직립시킨 것으로 고분의 연결부분 동쪽 사면에서는 표토 하 15∼20㎝에서 윗부분이 드러났으며, 총 길이는 8.2m에 걸쳐 확인되었다.
이 토기 열은 만곡(彎曲)된 분구 연결부분의 가장자리를 따라 활모양〔弓狀〕의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고분 서쪽에서도 원통모양토기 1점이 조사되어 연결부분의 양측 사면에 모두 원통모양토기 열이 배치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것은 분구 주위에서 행해진 매장과 관련된 의식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추정된다.
분구 둘레, 즉 방형부의 북쪽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 전체에서 U자형의 도랑이 조사되었다. 이것은 이 고분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이다. 도랑의 폭과 깊이 및 높이는 위치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결부분의 동쪽에서 확인된 도랑의 범위는 최대 폭 550㎝, 깊이 80㎝이며, 원형부 남쪽에서는 폭 150㎝, 깊이 40㎝의 규모이다. 도랑 내부에서는 다량의 원통모양토기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매장시설은 돌방〔石室〕이 유일한 것이었다. 돌방은 동쪽 모서리가 거의 원형부의 중앙지점에 놓이도록 분정부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축조되었다. 돌방은 봉토 기저부(基底部)의 성토층 위에 두께 15㎝의 회청색 진흙을 깔아 다지고, 그 위에 만든 완전 지상식 돌방이었다.
이 돌방은 도굴에 의해 원형을 복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남은 유구를 통해 보면 굴식돌방〔橫穴式石室〕으로 추정된다. 벽의 하부는 장대석으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는 이보다 작은 깬돌을 쌓아 올렸다. 돌방 바닥의 북동-남서방향 폭은 약 180㎝이다.
이 180㎝의 돌방 남동벽은 길이로 보아 단벽(短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돌방의 바닥은 적황색 성토층 위에 회청색의 진흙을 일정한 두께로 깔아 다지고, 그 위에 바닥석을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대부분 남동벽과 남서벽이 만나는 모서리 부근의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종류는 금동제귀걸이, 쇠화살촉, 보주형꼭지손잡이달린뚜껑〔寶珠形꼭지손잡이付蓋〕, 꾸미개, 띠고리, 뚜껑접시, 회청색경질토기조각 등이 있다. 이 고분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분구 둘레에서 조사된 U자형의 도랑, 도랑 내부에서 출토된 원통모양토기조각, 분구 연결부분의 사면에 세워진 원통모양토기 열 등을 들 수 있다.
원통모양토기는 태토(胎土)와 소성도(燒成度), 문양구성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형과 두드림〔打捺〕에 의한 시문방법(施文方法), 돋을띠〔突帶〕, 굽구멍〔透孔〕등 기본적인 기형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특히, 두드림기법에 의존하고 있는 시문방법은 분형상의 유사성에서 주목되고 있는 일본 전방후원분과의 비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돌방 내에서 출토된 유물 중 쇠화살촉과 화살통꾸미개의 잔편 등은 피장자가 무장적(武裝的) 성격을 지녔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명화동장고분의 명칭과 성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있다. 먼저 일본에서 제의를 위한 공간인 전방부가 한국에서는 북쪽을 향한 경우가 많은데 전통적인 풍수지리사상에서 보았을 때 제의가 북쪽의 방부에서 이루어졌는지가 의문으로서 꼭 전방부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다음으로 일본에서 발견되는 무덤형식인 전방후원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 영산강유역이 고대 일본열도의 사회체제 속에 포함될 수 있다는 인식상의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들어 전방후원분이라는 용어 대신에 ‘장고형고분’·‘장고분’ 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산강유역의 소위 독무덤〔甕棺墓〕들은 분구에 다장(多葬)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부가 1기인 명화동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분구 사면에 일본의 원통모양토기로 불리는 하니와〔埴輪〕가 세워져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일본열도와의 문화교류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복천동 제10·11호분 단계에서 비롯되는 장경식유엽형화살촉〔長頸式柳葉形鐵鏃〕이나 돌방의 남은 부분의 형태, 보주형토기뉴(寶珠形土器紐) 등으로 미뤄볼 때, 잠정적이나마 6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된다. 한편, 분구 기저부에서 조사된 2기의 주거지는 원삼국시대에서 고분시대 초기에 이르는 것으로 명화동장고분이 조영되기 전 이곳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