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왕릉은 1969년 8월 27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대지 면적은 3만 7,993㎡이다. 위치는 경주시의 북쪽을 건너 약 1㎞ 가량 떨어진 곳으로 백률사가 있는 소금강산의 남록 낮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왕릉은 20세기 초에 석씨 일족이 석탈해의 능으로 비정함으로써 현재까지 탈해왕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탈해왕의 성은 석씨(昔氏), 이름은 탈해(脫解, 혹은 吐解)라고도 하며, 제3대 유리왕(유리이사금)의 유언으로 왕위에 올라 62세에 왕이 되었다.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재위 23년간 왜구(倭寇)와는 친교하고, 백제와는 자주 다투었다. 계림(鷄林)을 국호로 하였으며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서기 57년에 왕이 되어 80년에 승하하였으며 죽은 뒤 경주에 있는 양정(壤井)의 언덕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왕릉의 외부 모습은 원형봉토분이다. 밑지름은 14.3m이고, 높이는 4.5m인데, 비교적 작은 형태의 무덤에 속한다. 그리고 왕릉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과 표식물이 없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1974년 12월 31일 도굴당했는데, 그 내부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었음이 밝혀졌다. 능 앞에 마련된 잘 다듬은 돌은 후대에 설치한 혼유석(魂遊石)이다.
현재의 탈해왕릉에 대해서는 그 위치비정을 부정하는 시각도 있다. 즉, 위치와 지리상으로 볼 때 초기의 고분권 지역인 경주평야 중심지를 벗어난 변두리 산록으로 옮겨졌다는 점에서 서기 1세기대가 아닌 신라고분 중기인 통일기 전후의 고분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분구의 규모가 소형급이며 묘제가 굴식돌방무덤이란 점에서 통일기 전후의 무덤과 상통한다는 점, 아울러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였다는 석탈해설화 내용으로 볼 때 왕릉 내부에는 유골이 없다는 점, 그리고 유골을 어떠한 사유에서든지 옮긴 묘는 보존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