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24∼57. 성은 박씨.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남해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
비(妃)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박씨,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또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나,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이질금(尼叱今)·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하는데, ‘잇금[齒理]’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는 전통적 해석이 있으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다.
사회적으로 이사금시대 왕의 성격은 부족연맹장(部族聯盟長)이라는 설이 있으나, 아무튼 종래의 거서간(居西干) 시대보다 문물제도면에서 향상된 시대였다.
28년(유리이사금 5)에 <도솔가 兜率歌>를 지었고, 32년에 6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의 성(姓)을 주었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했다고 한다.
6부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길쌈을 짜게 해 8월 15일에 짜낸 양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가배(嘉俳)놀이를 시켰는데, 이 때 부른 노래가 <회소곡 會蘇曲>이었다.
낙랑(樂浪)·화려(華麗)·불내(不耐) 등의 사람들이 북변을 쳐들어왔으며, 맥국(貊國)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삼국사기≫에서는 40년에 이서국(伊西國 : 지금의 경상북도 淸道)을 멸했다고 하나 이것은 14대 유례이사금의 기사가 착오(錯誤)된 것이다.
재위 34년 되던 해에 탈해(脫解)의 재능이 그의 두 아들보다 뛰어나다하여 왕위를 잇게 하고 죽었으며, 사릉(蛇陵)에 장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