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휴이사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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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인물
신라의 제9대(재위: 184년~196년) 왕.
이칭
이칭
벌휴왕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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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의 제9대(재위: 184년~196년) 왕.
개설

재위 184∼196. 발휘이사금(發暉尼師今)이라고도 한다. 성은 석(昔)씨. 부계(父系)는 탈해이사금의 아들인 구추(仇鄒) 각간(角干)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연대상으로 탈해가 죽은 지 104년만에 즉위한 것이므로 세대간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따라서 이것은 탈해 이후 석씨 세력이 쇠퇴해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거나, 벌휴계(伐休系)가 스스로 탈해의 후손이라는 근거도 없고 이치에 닿지 않는데도 억지로 끼워 맞추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것은 벌휴가 홍수·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사람의 그릇됨과 올바름을 알아맞혀 성인(聖人)이라 불린 데에서 시조적 성격이 농후하며, ≪삼국사기≫ 벌휴이사금 즉위조 이외에 구추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에서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아달라이사금이 아들 없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는 전투 능력을 비롯한 문화 수준에서 우위에 있던 새로운 세력 집단이 경주로 진출해 종래의 지배층을 압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석씨 왕계의 성립 이후 신라는 보다 급격하게 영역을 확대하였다.

185년(벌휴이사금 2) 구도(仇道)와 구수혜(仇須兮)를 처음 군주(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치고, 이어 188년 모산성(母山城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 또는 경상북도 의성 부근), 189년 구양성(狗壤城 : 지금의 괴산 또는 옥천), 190년 원산향(圓山鄕 : 지금의 예천군 용궁)·부곡성(缶谷城 : 지금의 군위군 부계) 등지에서 백제와 공방전을 치렀다고 전한다.

왕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가 김씨인 점으로 보아, 이제 박씨계는 고립되고 석씨와 김씨의 제휴 시대를 맞게 된 듯하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이종욱,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0)
『한국사강좌』-고대편-(이기백·이기동 공저, 일조각, 1982)
「삼한의 국가형성 상」(천관우, 『한국학보』 2,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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