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절터는 원래 신라 법흥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원각사(圓覺寺)라 했다고 전한다. 이 절에서 748년(신라 경덕왕 7)∼776년(혜공왕 12)에 걸쳐 발징(發徵) 화상이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열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이다.
발징은 『삼국유사』 「욱면비염불서승 郁面婢念佛西昇」조에 보이는 팔진(八珍)이며, 경내에는 이들의 왕생을 기념한 삼십일인등공유골기념지탑(三十一人謄空遺骨紀念之塔)이 있다.
937년(고려 태조 20)에 서봉사(西鳳寺)라 개칭하였으며, 1358년(공민왕 7)에는 나옹(懶翁)화상이 중수하여 건봉사라고 불렀다.
1465년(세조 11)에 왕이 행차하여 원당(願堂)을 정하고,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한 뒤, 논밭과 함께 동참문(同參文)을 내렸다. 1470년(성종 원년)에 효령대군(孝寧大君) · 신숙주(申叔舟) · 한명회(韓明澮) · 조흥수(趙興洙) 등을 파견하여 노비와 소금밭을 하사하고, 사방 10리를 이 절의 소유로 정했다.
1594년(선조 28)에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일본에 가서, 신라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가져와 통도사에 모신 부처님의 치아(齒牙)와 가사 및 천금(千金)을 내려 불상을 개금(改金)했고, 1708년(숙종 34)에는 능파교(凌波橋)를 만들었다. 1878년(고종 15)에 산불이 나서 절과 암자 3,183칸(間)이 모두 소실되었는데, 그 뒤 오랜 세월을 두고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와서는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에 의하여 건봉사는 30본산의 하나가 되었고, 말사(末寺)로는 백담사 · 신흥사 · 낙산사 · 화암사 · 영혈사 · 멸주사 · 수타사 · 조제암 · 심곡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한용운(韓龍雲)이 1907년∼1908년 무렵 이 절에서 수행하였다. 1921년에는 건봉사에서 봉림학교(鳳林學校)라는 지방사립 교육기관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때 절의 대부분이 불타 버리고, 현재 옛 건물로는 불이문(不二門) 1칸이 남아 있는데, 단청공사 때 『선교양종대본산건봉사불이문중창양간록 禪敎兩宗大本山乾鳳寺不二門重創樑間錄』 및 『원각경 圓覺經』 · 『금강경 金剛經』이 상량(上樑)에서 나온 바 있다.
석조물은 대부분 남아 있으며, 그 일부는 1950년대 중반에 간성(杆城) 시내의 포교당으로 옮겨서 건봉사의 법맥을 이어 왔다.
경내 초입(初入)의 육송정 홍교[六松亭 虹橋, 백운교(白雲橋)] 하부 석재에는 이 홍교(虹橋) 축성과 관련된 승려 및 석공 · 목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건봉사지 乾鳳寺誌』에는 31기(基)의 비(碑)가 실려 있으나 현재 14기가 있다.
탑은 경내에 세존영아탑(世尊靈牙塔) · 석가여래치상탑(釋迦如來齒相塔)이 있고, 부도군에는 1990년의 조사에 따르면 모두 30기의 승탑(僧塔)이 있다. 1989년부터 건봉사 일대가 민간인 출입이 가능해지자 1990년부터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