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교항리고분군은 주문진읍을 관통하여 동해로 들어가는 신리천(新里川)의 남쪽에 있는 천마봉(天馬峰)의 동북 기슭에 분포하고 있다. 현재는 과수원 등 밭으로 경작되어 대부분 파괴되었는데 돌방의 천장석이 노출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아울러 경작시 토기 조각이 수집되면서 이 일대의 고분이 신라의 돌방무덤임을 알게 되었다. 돌방의 천장석 중에 길이 320㎝, 너비 170㎝, 두께 30㎝나 되는 것이 있어 천장석을 갖춘 돌방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강릉의 옛 지명인 명주는 영동지방의 중앙에 위치하며 본래 예국(濊國)의 도성으로 한무제(漢武帝) 때 임둔군(臨屯郡)이었고 고구려시대에는 하슬라(何瑟羅)로 불리었다. 신라는 512년(지증왕 13)에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의 군주(軍主)에 임명되어 이때부터 완전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639년(선덕왕 8)에 북소경(北小京)을 설치하여 사신(仕臣)을 두었다가 658년(무열왕 5)에 소경을 없애고 하서주(何西州)로 개편하여 도독(都督)을 두어서 진수하게 하였고, 다시 757년(경덕왕 16)에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로 고쳤다.
신라에서는 5∼6세기에 걸쳐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이 출현하여 보급되고 이어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출현하여 유행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안으로 율령을 정비하고 연호를 제정하는 등 중앙집권국가로서의 체제를 완비하고 불교를 공인했으며 밖으로 낙동강유역을 확보하고 한강유역과 원산만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넓히는 사업을 일으키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강릉에는 신라고분군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덧널무덤[木槨墓]과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널무덤[石棺墓] 등이 축조되었으며 신라계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교항리고분군 역시 그와 같은 신라의 국내외적 상황과 맞물린 속에서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