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널무덤은 널을 넣어 두는 널방을 나무로 짜 맞춘 무덤양식이다. 목곽묘·목곽봉토분·목곽분·나무곽 무덤이라고 한다. 나무널과 덧널 사이에 공간이 있는 형태이다. 지상에 설치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 묘광 안에 설치되었다. 덧널은 다량의 목재를 사용하여 현장에서 설치하여 나무널과 부장품을 함께 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고구려와 한반도 남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축조되었다. 대형 덧널에서 출토된 다종다양한 부장유물은 당시 사회와 문화를 복원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한국식동검이 많이 출토되었다.
나무널과 덧널 사이에는 여유가 있는 형태이며, 한자로 표기할 때는 목곽묘(木槨墓)라고 한다. 지상에 설치한 것도 있으나 묘광 안에 설치한 것이 주류이며, 나무널을 감싸는 돌덧널무덤[石槨墓]과 대비된다.
나무널이 피장자를 담아 운반할 수 있는 작은 것인데 비해서 덧널은 다량의 목재를 사용하여 현장에서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나무널과 달리 덧널 내부의 규모는 나무널과 부장품을 함께 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실제로 덧널 속에는 이름 그대로 나무널이 있는 예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덧널무덤을 목곽묘라고 하지만 특히 봉분의 형태가 뚜렷하면 목곽분(木槨墳)으로도 부를 수 있다.
우리나라 덧널무덤의 기원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중국과 남부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그리고 몽골 초원지대와 유럽에서도 이러한 무덤이 알려져 있다. 또한 유구 내용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한반도 각지, 특히 발굴 기수가 많았던 서북부의 한국식동검[細形銅劍] 출토 무덤은 보통 덧널무덤으로 보고 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중국 산동성의 신석기시대 덧널무덤[서기전 4천년경 大汶口文化]의 내부형태는 상자 모양이다. 은 · 주(殷周)시대에는 그것을 각재 또는 목판으로 만들고, 한(漢) 이후는 주로 중국 화북의 덧널형태가 대동강 유역의 낙랑(樂浪) 묘제로 이어진다.
한반도 초기철기시대 이래 덧널무덤은 맨 먼저 낙랑 무덤에서 나타난다. 낙랑[서기전 108년∼서기 313년] 무덤은 땅을 깊게 파서 내부시설을 만들고 방대형의 봉분을 갖추는 것이다.
전반기에 덧널무덤이 성행하고, 후반기에는 벽돌무덤으로 대체된 뒤에도 덧널 구조는 고구려와 한반도 남부지역에 이르기까지의 무덤 구조로 광범위하게 축조된다. 낙랑 덧널의 평면 형태는 폭이 좁은 세장방형(細長方形)과 너른 방형(方形)으로 구분되고, 구조 형식은 구덩식[竪穴式]이 일반적이지만 앞트기식[橫口式]인 것도 있다.
먼저 나타난 형태는 한 사람의 널을 담을 수 있는 세장방형이며 앞쪽에 부장 칸을 둔 무덤이다. 그 다음에는 앞쪽의 부장 칸을 생략하고 그만한 공간을 확보해둔 무덤이다. 널 하나를 추가할 때는 그 곁에 추가 덧널을 붙이거나 별도의 묘광을 파서 나란하게 설치하고, 또한 아예 추가로 널을 넣을 수 있도록 처음부터 폭을 넓게 하여 평면 방형으로 설치하기도 한다.
따라서 세장방형보다는 방형이 상대적으로 시기가 늦을 뿐 아니라 추가장(追加葬) 방식이 적용된 합장용(合葬用) 구조로 발전된 형태가 된다. 그리고 묘광 벽면과 덧널 사이에는 충전토로 채운 구덩식이 일반적이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형태는 대부분 합장용이며, 방형으로 짜 맞춘 큰 외곽〔外槨: 귀틀곽이라고도 하는데, 방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갖추고 그 안에 방형 · 장방형 덧널이 있는 구조가 주류를 이룬다. 외곽을 갖춘 구덩식이 주류라고 할 수 있는데, 덧널 안의 널 수는 둘 혹은 셋이며 그 곁에 별도로 장방형 덧널을 추가로 붙인 것도 있다. 그리고 외곽 중의 부장공간은 내곽의 머리맡에 두거나 곁에 두기도 하고 어떤 것은 이 양자를 더하여 넓은 ‘ㄱ’자형의 공간을 갖춘 형태이다.
마지막 단계는 덧널의 북편에 부장덧널[副葬槨]이 딸린 덧널무덤이다. 이 구조는 이미 새로 도입되기 시작했던 횡장방형(橫長方形) 전실(前室)이 딸린 앞트기식 벽돌방무덤〔橫口式 塼室墳〕의 한 유형을 답습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장덧널 중에는 장방형 덧널에 같은 구덩식으로 붙인 것과 방형 덧널에 앞트기식으로 붙인 것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전자는 벽돌방무덤의 형태만 답습했을 뿐 앞트기식을 적용하지는 않은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외곽을 갖춘 낙랑 덧널무덤 중에는 2단으로 굴광한 것, 그 아래에 벽돌을 깐 것, 배수구(排水溝)를 설치한 것, 외곽과 묘광 벽면 사이를 큰 자갈로 채운 것도 있다. 그리고 목관은 나비연결구[蝶形連結具]를 사용한 상자형이 일반적이지만 통나무를 깎아 만든 것도 있으며, 부부합장인 경우 여자 널을 남자 널의 왼쪽에 배치하는 것이 상례이다.
한반도 중 · 남부에서 덧널무덤은 삼한 후기에 해당하는 2세기 중엽부터 삼국시대의 5세기 전엽을 전후한 시기까지 나타나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소형 무덤에 석재를 부가한 형태로 5세기 말경까지 지속된다.
종래 나무널이나 나무덧널의 유무와 무관하게 묘광만 남아 있어 움무덤[土壙墓]으로 불렀던 이 무덤의 내부구조가 마한에서는 주구묘(周溝墓) 혹은 분구묘(墳丘墓)로 부르는 무덤에서 상당수를 차지한다. 특히 진한 · 변한에서는 널무덤 시기가 지나면 거의 모든 무덤이 덧널무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크게 유행한다.
덧널 시기 중의 늦은 4세기대의 큰 덧널은 주로 영남지방에서 많이 발굴되었다. 영남지방에서는 별도의 부장덧널과 순장(殉葬) 그리고 무장구인 갑주(甲冑)를 비롯하여 다양하고 많은 부장품을 갖춘 후장(厚葬)이 성행하였다. 다만, 지금까지 낙랑의 대형 덧널처럼 밑면의 나무바닥 시설이 확인된 예는 없다.
평면 형태는 이른바 김해식이라고도 하는 장방형과 경주식이라고 하는 세장방형으로 나타나는데, 장방형계의 분포범위가 넓다. 특히 큰 덧널무덤 중에 흔히 갖춘 부장덧널의 배치는 두 가지 형태이다. 세장방형 덧널인 경우에는 주 · 부 덧널을 나란히 병렬로 배치하고, 장방형인 경우는 대개 양자의 장축 방향을 일렬로 맞추어 배치하는 것이 많지만 일부는 병렬로 배치하기도 한다. 주 · 부 덧널의 바닥면 깊이는 같은 것과 주 덧널이 더 깊은 것으로 구분되며, 주 덧널이 부장덧널보다 상대적으로 큰 예가 주류이다.
삼국시대 덧널무덤은 지역에 따라 시기차가 있으나 대개 구덩식이나 앞트기식 · 굴식의 돌덧널무덤 · 돌방무덤 그리고 독널고분[甕棺古墳]으로 대체된다. 고령 지산동73호분은 덧널에 고총(高塚) 봉분이 적용되어 있어 주묘제가 덧널무덤 시기에서 구덩식 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 시기로 이행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의 무덤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덧널은 순수 덧널이 아니라 덧널에 다량의 석재를 부가한 것인데, 깊은 묘광과 주 · 부 덧널 및 주위에 여러 순장덧널이 적용되어 있다.
그런데 고총을 조성하던 시기에 석축조 내부구조의 유행이 늦은 지역 중에는 영산강유역권처럼 대형 독널무덤[甕棺墳]이 5세기에 유행한다. 또한 지산동73호분의 덧널구조와 유사하게 대량의 석재를 부가한 구조도 적지 않다.
하나는 낙동강유역권의 합천지역에서 유행하는 5세기 후반대 대형 돌돌림덧널무덤[圍石木槨墳]이다. 다른 하나는 5세기와 6세기 전반에 크게 유행한 구조로, 덧널 주위와 상부에 대량으로 돌을 쌓은 경주 일대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이러한 돌돌림[圍石] 혹은 돌무지[積石]를 부가한 고총의 내부구조 형식이 영남지방의 여러 지역에도 확인되고 있으나 대부분 일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대형 덧널에서 출토된 다종다양한 부장유물은 당시 사회와 문화를 복원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처럼 무덤의 내 · 외부 확대, 무덤 수의 대폭 증가, 부장품의 대량화, 영남지방의 순장 등은 다음 단계의 본격적인 고분문화 최성기를 앞둔 한반도 고분영조기 중의 전기 묘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