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

고대사
제도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서기전 108년 동이(東夷)의 조선(위만조선) 지역에 설치한 군(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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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서기전 108년 동이(東夷)의 조선(위만조선) 지역에 설치한 군(郡).
개설

한나라가 주변의 이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외이(外夷)의 공간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그 일환으로 설치한 군이다.

한사군의 위치를 중국의 요동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한반도 중·북부 및 남만주 일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낙랑군의 관할지역은 오늘날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낙랑군은 서기전 108년 한 무제(武帝)에 의해 옛 고조선의 중심부에 설치되어 이후 약 400여 년간 동방에 대한 중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침투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조선현(朝鮮縣)을 수현(首縣)으로 하고 11개의 속현을 거느리며 출발한 낙랑군은 한사군의 중심지였다.

연원 및 변천

군현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중국이 황제의 중앙집권적 통치를 목적으로 설치한 직할행정단위이다. 그런데 낙랑군은 한무제가 조선을 직접 통치해 결과적으로 중국의 영역을 확대할 목적으로 설치한 군현은 아니다.

본래 중국은 조선을 외신국(外臣國)으로 삼아 동이지역을 간접 경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외신의 위치를 지키지 않았다. 위만조선의 역대 왕들은 중국에 친조(親朝)하지 않았음은 물론, 진번(眞番)을 비롯한 주변의 국가들이 중국과 교통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당시, 한나라 최대의 적은 중국 동북 변경(邊境) 지역으로부터 서북 변경 일대에 걸쳐 자리잡고 있던 흉노세력이었다. 조선은 중국인에게 ‘흉노의 왼팔[左臂]’이라고 인식될 만큼 흉노에 밀착되어 있었다.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반목하는 외교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한무제는 섭하(涉何)를 사신으로 파견해 조선왕 우거(右渠)에게 외신의 위치를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이 요구를 거절하자 섭하는 조선의 장수를 살해하고 본국으로 달아났다. 후일 섭하가 조선에 근접한 요동군의 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로 부임하자 조선은 그를 기습 살해함으로써 응징하였다. 조선이 섭하를 살해한 사건은 결국 한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는 발단이 되었다.

서기전 109년 중국은 수륙양군을 동원해 조선을 공격하였다. 1년 동안의 전쟁 결과 조선이 멸망하고 그 지역에는 낙랑군을 비롯한 진번·임둔(臨屯)·현도군(玄菟郡)이 설치되었다. 주목할 것은 한무제가 전쟁의 와중에도 사절을 통해 조선과의 강화를 모색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을 황제의 직할지로 삼아 중국의 일부로 만들려는 의도가 없음을 재삼 표출한 행위였다. 낙랑 지역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동이의 공간이었다. 따라서, 군현의 설치과정을 통해서도 조선을 중국화 할 의도는 없었는데, 이는 군현의 체제에도 잘 나타난다.

중국 일반 군현과는 달리 낙랑군 체제는 중국이 이식한 군현체제와 원주민의 국읍체제(國邑體制)가 혼합된 형태였다. 국읍(國邑)에는 거수(渠首)로 불리는 원주민 집단의 군장(君長)이 있었고, 그의 통솔 아래 토속적인 관제(官制)와 법령인 속율(俗律)도 운용되었다.

『한서』·『후한서』·『진서』의 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의 군현체제는 시간의 경과와 아울러 현저히 위축되어 갔다. 이는 역으로 원주민의 국읍이 활동의 범위를 넓혀갔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국읍체제가 병존하는 낙랑군의 모습은 군현의 본래 형태로부터 크게 변질된 것이다. 이러한 체제는 낙랑군만의 특성이 아니라 동이·남만(南蠻)·서남이(西南夷)의 주거지에 설치한 군현에 공유된 특성이었다. 낙랑군은 운영면에서도 일반 군현과는 달리 관료조직과 행정체제에 의존함이 적었다.

그리고 낙랑군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군에 파견되는 태수·현령(縣令)과도 같은 지방관직의 정상적 운용이 불가능하였다. 반면에 군민(郡民)의 역할은 그만큼 증대되었다. 군민은 낙랑군 설치 이전부터 조선에 망명해 토착화된 한인계(漢人系) 주민과 원주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한인계 주민이 군현의 운영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군과 현의 속리직(屬吏職)과, 지방관의 업무를 대행하는 등 낙랑군에서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한인계 주민의 대개는 토착화했기 때문에 원주민들과 종족·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은 갈등은 적었다.

더구나 이들의 토착화는 자연히 주거집단으로서의 관성(慣性)을 갖게 하였다. 특히, 군현체제의 위축과 지방관이 단절된 상태에서도 낙랑군이 313년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관성 때문이었다.

또한, 낙랑군은 군현이라는 기구의 성격상 황제에 직속하는 기구이다. 그런데도 주변 관부(官府)의 지원과 영향을 받았다. 요동군을 비롯해 유주(幽州)의 감찰업무를 담당하는 유주자사부(幽州刺史府), 그리고 진대(晉代) 동이와 선비족을 관리한 동이교위부(東夷校尉府) 등이 낙랑군을 지원하였다.

내용

낙랑군은 동이지역의 여러 종족을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체계로 유인하기 위해 기능하였다. 낙랑군 설치 직전까지 동이지역에서는 조선에 의한 동이의 일원화 작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군현의 설치는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하고 파괴하는 작업이었다. 또한, 군이 존재함으로써 동이와 새외민족(塞外民族)간의 유대는 차단될 수 있었다.

낙랑군은 군에 편입된 원주민세력을 다수의 국읍(屬國)으로 분할시켰고, 군외(郡外)의 주민에 대해서도 중국에 위협이 될 수 없는 소규모적인 국읍(藩國)으로 존속하도록 하였다. 분리된 상태에서의 동이제족(東夷諸族)은 자연 낙랑군에 의존하였다. 이로써 동이의 중국질서로의 편입이 수월하게 되었다.

중국적 세계질서로의 편입을 중국은 ‘내속(內屬)’이라고 불렀는데, 낙랑군은 바로 내속을 실현하기 위한 기구였다. 현도군이 북방의 고구려·부여의 내속을 관리한 것에 반해 낙랑군은 군내(郡內)의 원주민 집단을 비롯해 동부의 예(濊)와 남부의 한(韓)·왜(倭)의 내속을 주관하였다.

3세기 초 대방군이 분리된 후에는 삼한(三韓)의 일부와 왜의 내속업무는 대방군으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내속의 업무를 위해 간혹 군사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이 상용한 방법은 조공(朝貢)을 주선하고 책봉(冊封)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낙랑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연구는 정치거점설과 교역거점설로 나누어 파악되고 있다. 정치거점설은 중국사의 관점에서 낙랑군을 한왕조의 정치적 식민지로 파악하는 입장이다. 즉 고대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서 낙랑군을 한의 군현지배의 한 유형으로 파악한 연구이다. 일본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견해는 다수 한인(漢人)들이 낙랑군 설치 이전부터 존재하다가 낙랑군 지배에 의해 한인관리와 토착 한인에 의한 종족적 지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낙랑군은 한인을 지배층으로 하고 토착민을 피지배층으로 하는 이원적 종족구성을 갖는 한의 식민지라는 견해이다. 이 같은 견해는 동아시아세계론에 입각하여 낙랑군의 설치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한반도에 걸친 민족의 발전을 저해했지만 동아시아 제민족이 고도의 중국문명에 접촉하여 문명화로 가게 되었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교역거점설은 낙랑군의 성격을 단순한 한의 식민지가 아닌 경제적 성격을 중심으로 검토한 논의이다. 낙랑군의 식민지적 의미를 축소하여 대동강변의 교역거점인 한인방(漢人坊)으로 보거나 조계지(租界地)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고 낙랑과 삼한 사이의 교역 및 조공무역 등을 강조한 입장이 제시되었다. 이는 평양지역의 중국식 문화유물 유적에 대한 설명을 한반도에 존재한 중국인의 상업중심지라는 논리로서 설명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견해이다.

또한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낙랑국과 한군현의 낙랑군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한의 군현인 낙랑군과 자치체적 정치체인 낙랑국이 병존했다는 설과, 낙랑군에는 다수의 국읍이 존재했고 낙랑국은 그 가운데의 하나라는 인식이다.

최근에는 평양시 낙랑구역의 한 목곽묘(木槨墓 : 귀틀무덤)에서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현별 호구통계를 기록한 목간이 출토되었다. 이 목간에는 기원전 1세기 중엽 낙랑군의 주민구성을 비롯한 군현운영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가 나와 있는데, 이는 낙랑군 연구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놓는 중요한 발견이다. 그러나 목간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북한에서 추가 보고가 없는 한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소개된 현별 호구수를 가지고 낙랑군 전체의 호구수를 복원하고 이의 의미를 검토하는 정도이다.

의의와 평가

낙랑군은 중국이 기대한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대국가의 출현이 3∼4세기 가량 늦게 나타나고, 고대국가의 출현이 통합된 형태를 보이지 못하고 군이 소재한 지역을 분기점으로 하여 고구려·백제·신라라는 3국의 형세로 분할되었다는 사실로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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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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