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실분(塼室墳)’이라고도 한다. 벽돌방무덤은 벽돌을 쌓아 네 벽을 만들고 벽면의 상부를 점차 안으로 기울게 해 궁륭(穹窿, dome) 또는 터널천장을 이루고 있다. 이 무덤 양식은 방의 수에 따라 여러방식〔複室式〕과 외방식〔單室式〕으로 분류되며 대개 남벽에 널길〔羨道〕문이 설치되어 있다.
벽돌을 사용해 무덤을 축조하기 시작한 시기는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였으나 전한(前漢)이래로 많이 쓰였으며, 육조(六朝)·당(唐)·송(宋) 때에 이르러서도 다수 축조되었다. 낙랑군의 벽돌방무덤들도 전한과 같은 계통으로서 후기인 3세기경부터 낙랑이 멸망된 뒤인 4세기 말경까지 상당수가 만들어졌다.
널방〔玄室〕의 바닥은 지하에 설치하지만 벽은 거의 절반 이상이 지표 위로 올라와 있으며, 그것을 봉토(封土)로 덮어씌우고 있다. 벽돌은 문양이 있는 좁은 면이 내부벽이 되도록 하며, 내부는 연꽃 등의 문양에 의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벽돌쌓는 수법은 옆으로 3단, 세워서 1단을 반복해 축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매장은 널길을 통해 널〔木棺〕이 안치되며 부부묘나 가족묘일 경우 널길 입구를 개폐(開閉)해 추가장(追加葬)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백제지역에서는 공주로 수도를 옮긴 뒤 중국 화남(華南)지방의 영향을 받은 벽돌방무덤이 축조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무령왕릉(武寧王陵)과 송산리 제6호분을 들 수 있다.
이 두 무덤의 천장은 모두 터널식으로 북벽과 동서 양 벽에 창살문 모양과 등잔을 넣었던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특히, 공주 유일의 벽화고분인 송산리 제6호분의 경우, 벽면에 진흙을 바르고 호분(胡粉)으로 그 위에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의 사신(四神)을 그려 넣어 각각 그 방위를 수호하고 진무하게 하였다.
한국에서 벽돌의 사용은 낙랑군시대로 올라가지만 그 예는 많지 않다. 낙랑지역에서는 후한대부터 많은 수의 벽돌무덤이 축조되었고 실제 조사가 이루어진 예도 많다. 뿐만 아니라 낙랑토성지(樂浪土城址)에서는 관가(官家) 등의 축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을 점령한 고구려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벽돌의 사용이 적극적으로 계승되지 않은 듯하다. 고구려지역에서 벽돌무덤이 축조된 사례는 전무하다. 신라에서는 황룡사지의 일부 구간에 벽돌이 쓰인 유구가 있으나 무덤에서 발견된 사례는 없다.
반면 백제는 고구려·신라에 비하면 중국 남조(南朝) 계통의 벽돌무덤이 2기나 축조되어 있으며 그 외에 여러 성격의 유적에서도 벽돌이 출토된 바 있다. 따라서 백제의 벽돌방무덤은 백제가 육조시대의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문화교류를 했음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