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정(晸)이며, 경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875년에 즉위하여 886년에 승하할 때까지 12년간 재위하면서 문치와 내정에 힘썼다.
헌강왕릉은 1969년 8월 27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6만 9,626㎡이다. 왕릉의 배경인 남산은 주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기복하고 그곳에서 달려나간 각 소릉이 사방으로 뻗어나가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에 형성되어 있다. 이 왕릉은 남산의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한 지릉의 말단에 위치한다.
헌강왕릉에 대한 보수 수습 조사는 1993년 8월 초 우기 때의 자연붕괴로 인해 그 해 9월 16일부터 10월 30일까지 약 45일간 실시되었다. 이 기간에 봉토 단면과 유구 내부를 조사할 수 있었다. 무덤 크기는 지름 15.3m, 높이 4.2m이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으로서 밑둘레에는 길이 60∼120㎝, 너비 30㎝ 내외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4단으로 쌓아올려 무덤의 보호석으로 삼아 튼튼히 하였다.
무덤 양식은 널길을 동벽에 편향해서 설치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다. 널방은 남북길이가 2.9m인데, 남북길이가 동서길이보다 약간 더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널방의 벽석들은 최하단의 생토층을 약간 파내고 직경 40∼60㎝ 전후의 괴석으로 축조하였다. 하단부에는 비교적 큰 석재를, 상단부에는 작은 석재를 쌓았으며 사이사이 공간은 잡석으로 채운 후 틈사이를 강회로 막고 있다. 널방의 벽면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기울었으며 구석부분은 엇물려쌓기 방식으로 석재를 처리하고 있다.
널길은 널방 남쪽의 동쪽면에 치우쳐 부설되어 있으며 제반시설인 돌문〔石扉〕, 문지방, 폐쇄석, 무덤길〔墓道〕등을 갖추고 있다. 돌문은 장방형 괴석 한쌍을 동서에 수직으로 세워 활용했다. 문지방은 장방형 깬돌 3매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남북 장축의 평평한 면이 위로 오도록 가지런하게 놓고 빈 공간에는 잡석을 채워서 돌문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무덤길은 널길 뚜껑돌 아래의 첫 번째 남쪽 벽석부터 널길쪽으로 약간 튀어나오도록 하여 무덤길과 널길을 구분지었으며 이들 바닥층은 직경 15㎝ 내외의 납작한 자연석 1단을 전면에 깔았다.
경주지역의 고분들은 대략 널무덤〔木棺墓〕·덧널무덤〔木槨墓〕시기,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시기, 굴식돌방무덤 시기의 3시기로 구분된다. 그런데 3시기의 묘제, 곧 굴식돌방무덤은 구조상 붕괴될 위험이 크고 도굴이 용이하다. 따라서 이 양식의 신라왕릉에 대한 연구경향은 봉분과 둘레돌 등의 외형적 모습을 서로 비교한 후 문헌과 접목시켜 왕릉 주인공의 진위여부나 위치와 선후관계를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강왕이 승하한 뒤 보리사(菩提寺)의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보리사를 기준으로 이에 해당하는 무덤을 헌강왕릉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보리사는 헌강왕릉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비구니 사찰로서 최근에 중건되었다. 그런데 이 사찰 뒤편에서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이 발견된 바 있는데, 이 불상의 제작연대를 대략 8세기 중엽에서 후엽의 작품으로 판단하고 있어서 헌강왕이나 정강왕이 승하한 시기와 거의 비슷하다. 또한 이 석불좌상 외에도 주변에 산재하는 각종 석재, 탑재들과 지형은 과거 이곳에 존재하던 보리사와 관련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한편 헌강왕릉은 무덤 보호석을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4단으로만 쌓아 올린 형식을 보이는데,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왕릉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써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