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검총은 신라고분들 중 가장 먼저 학술적 조사가 실시된 것으로서 경주 황남동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대릉원 내의 미추왕릉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분은 1916년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關野貞〕등이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때 철검(鐵劍)이 출토되어 검총으로 명명되었으며, ‘황남동 제100호분’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고분이 속해 있는 사적 황남동 고분군은 2011년 7월 28일에 사적 경주대릉원일원으로 재지정되었다.
이 고분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최대 지름 44.5m, 높이 9.7m에 이르는 대형 고분이다. 고분 중심부에 지반을 깊이 약 67㎝ 파고 여기에 냇돌을 1.2m 두께로 깔아 무덤의 상면(床面)으로 하고 껴묻거리〔副葬品〕와 피장자를 안치시켰다. 그러므로 무덤의 상면은 주위 지반보다 오히려 높게 설치된 셈이다.
이 매장주체부는 냇돌로 쌓은 돌무지〔積石〕로 덮여 있었다. 돌무지의 높이는 약 3.7m, 남북 지름 약 14.5m이며, 중심부 표면에는 두께 약 15∼18㎝로 진흙〔粘土〕이 덮여 있었다. 그 위에 축조된 봉토는 흙과 자갈을 섞어 쌓았다. 봉토 가운데의 자갈층은 모두 고분 중심부 쪽으로 경사져 내려와 있었다.
매장주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쇠투겁창〔鐵矛〕 2점, 숫돌〔砥石〕1점, 철검 2점, 쇠칼〔鐵刀〕1점, 굽다리긴목항아리〔臺附長頸壺〕등이 있다. 그 밖에 봉토 가운데에서 이 고분과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후세에 매장된 토기류 몇 점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전면발굴이 실시된 것이 아니었고, 또 정식 발굴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아 부분적인 내용 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관계자료에 의하면 매장주체부는 발굴된 것이 틀림없는데, 지금까지 발굴된 경주의 다른 대형고분들과 비교해볼 때 이례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 거대한 외형이나 내부구조에 비해 출토유물이 빈약하다.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시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중 다른 대형분들에는 모두 금관과 금제허리띠〔金製銙帶〕및 띠드리개〔腰佩〕 등의 호화스럽고 풍부한 유물들이 매장되어 있다. 이에 비해 이 검총은 규모나 내부구조에 있어서는 다른 대형분들과 다를 바 없지만 출토유물은 거의 없는 편이다.
외형의 규모는 지금까지 발굴된 대형분들인 서봉총(瑞鳳塚)·금관총(金冠塚)·천마총(天馬塚) 등과 거의 같다. 그리고 내부구조에 있어서도 묘상(墓床)이 원지반보다 높게 설치된 점, 봉토의 축조수법이 내향경사(內向傾斜) 쌓기로 된 점 등이 서봉총·금관총·천마총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등 신라시대 돌무지덧널무덤 중 대형 고분에서만 볼 수 있는 수법이다.
둘째, 이 고분의 출토유물 중에서 동일한 시기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즉, 이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로서 굽다리긴목항아리는 완전한 고분기(古墳期)의 것이지만, 철검은 다른 신라시대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출토된 예가 전혀 없고, 고분기 이전에 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고분은 신라시대 돌무지덧널무덤 중 대형분에 속하면서도 다른 대형분과는 성격상으로 분명히 다른 점을 지니고 있다.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중 대형분은 신라사에 있어 마립간시대 왕권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축조된 것이다. 고총고분이라는 것은 고대사회에 있어서 왕권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그들의 세력을 과시하는 하나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가계(家系)가 중요시되었던 고대사회에 있어서 새로 왕권을 잡은 마립간시대 신라왕들이 그들의 출자(出自)를 과시하기 위해 그들의 조상묘를 대형화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이것은『삼국사기』신라본기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19년조(435)의 “역대의 능원을 고쳐 쌓았다”라는 기록과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경주검총은 마립간시대 신라왕들이 대형화하였던 그들의 조상묘 중 하나의 실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